샘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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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10




밤바람이 서늘했다. 도시의 항구는 평소 빽빽하게 자리잡은 배들로 혼잡스러웠지만 오늘밤에 정박한 배는 요트 몇 대뿐이었다. 어두움 속에서 길게 뻗은 선착장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수천 달러는 훌쩍 넘겨 보이는 수트를 입은 초로의 남자는 단단히 다문 입술 끝을 고집스럽게 아래로 내린 퉁명한 표정이었다. 남자는 유난히 선이 유려한 요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던 남자는 걸음을 돌려 선착장 끝을 향했다. 그리고 흐르는 강을 응시했다.


강 물결 소리와 요트가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심야의 정적을 흔들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밤이었다. 강을 바라보던 남자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얼굴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냉혹한 분위기는 남자가 딛고 선 재력이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반지나 커프스단추를 담는 작은 케이스였다. 악마에게 팔아버린 영혼에게도 떨칠 수 없는 회한이 남을 수 있을까? 케이스를 보며 남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남자의 그런 모습을 조준경이 담았다

 

미동없는 남자의 머리를 중심점이 잡았을 때, 조준경 안에서 남자가 움직였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다시 무언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였다. 남자는 종이를 펴더니 들어 보였다. 조준하는 저격범에게 잘 보이도록.


<네가 찾던 물건 이 안에 있어.>


남자는 케이스를 흔들어 보였다. 돌발사태였다. 하지만 저격범은 당황하지 않았다. 은신처에서 여전히 타겟을 조준하며 이 상황이 함정일 경우 빠져나갈 퇴로를 다시 계산했다.


양복을 입은 남자는 주머니에서 다른 종이를 또 꺼내 펼쳐 보였다.


<거래를 제안하지.>


조준경 속에서 남자는 자기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얼굴을 뜯어냈다. 아니, 가면을 벗었다. 얼굴을 확인한 저격범은 혀를 찼다. 스나이퍼 라이플을 거둔 저격범은 캐리어에 총을 넣고 지퍼를 채웠다. 그리고 배낭을 집어 들었다.


 

 

"순순히 응할까요?"


방탄 조끼를 입고 자동권총을 든 젊은 요원이 다가왔다. 양복을 입은 남자는 무심하게 말했다.


"쉽진 않겠지."


"그렇겠죠."


젊은 요원은 이어피스를 누르며 명령했다.


"상황 보고해."


-타겟 위치 파악. 11시 방향 500미터. 컨테이너 위.


-반경 2Km 통제 완료.


요원이 바라보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원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시작해."

 


선착장 옆으로 잠수함 한 대가 부상했다. 선체 옆 출입구가 열리며 선착장과 이어지는 다리가 되자 중무장한 전투대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항구를 바깥쪽에서 포위했던 전투 부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론 수십 대가 포위망을 좁히는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컨테이너 위에서 몸을 일으킨 저격범은 공중에서 위치를 고정하는 드론을 흘낏 보고는 저격소총 캐리어와 배낭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핸드폰의 버튼을 누르더니 지면으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본부 상황 분석실은 인간의 편의보다는 기계의 안전을 우선시해 온도가 서늘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모니터들은 항구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항구와 주변을 보여주는 모니터들 중 흑백의 낮은 해상도로 항구를 보여주던 모니터가 갑자기 블루스크린을 띄웠다. 분석 요원은 카페인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자 모니터는 흰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항구에선 드론이 예리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상공에 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드론 일부가 하강하더니 수색견처럼 항구 곳곳을 낮게 비행했다. 그리고 드론의 짐벌에 고정된 열화상 카메라는 모든 상황을 촬영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본부에 전송했다.


분석요원은 다시 키보드로 명령어를 입력했다. 그러자 화면에 빈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입체설계도를 연상시키는 건물과 구조물의 뼈대와 인간의 열적외선 이미지만 띄웠다.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미지엔 독특한 표시가 있었다. 전투대원들은 헬멧에, 선착장에 있는 책임자는 수트 자켓에, 그 옆에 있는 팀장은 방탄 조끼에 모두 X마크가 선명했다. 표식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분석요원은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타겟이 2-A포인트로 이동했다. 반복한다, 타겟이-"


요원은 말을 멈췄다. 얼굴을 찡그리고 다시 키보드 조작을 했다. 명령어를 몇 번을 다시 입력하고 카메라를 이동시켰다.

 

 

 

막 컨테이너 모퉁이를 돈 테디는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바뀌었다. 진녹색 배경에 흰색 외곽선으로 보이던 세상이 실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진행 방향을 알려주던 화살표가 사라졌다. 야간투시경이 VR모드에서 통상 모드로 전환된 것이다. 젊은 요원들과는 달리 테디는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인공위성과 드론의 카메라가 찍은 영상을 분석해 주변을 디지털 도면화하고 타겟과 대원들의 위치를 분석해 각자의 최단 거리를 화살표로 안내해주는 시스템이 편리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꼭 마리오네트가 되는 기분이 들어 다른 나이 든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테디도 유쾌하지 않았다. 기술의 발달은 지금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존 야시장비보다 시야가 선명해지는 것으로 충분했다.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 운명을 좌우하는 건 최첨단 장비가 아니라 필드에서 경험으로 익힌 감이라는 게 테디의 신념이었다.


상황실에서 알려준 지점에 타겟은 없었다. 테디는 사방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다음 컨테이너의 사각지대를 향했다. 컨테이너에서 직선으로 떨어져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속을 걷고 있노라니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서 혼자 움직이는 기분이 들어 묘하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VR모드 후유증인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테디는 아무리 비현실적이어도 오늘 작전의 타겟만큼 비현실적인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몇 시간 전 테디는 하마터면 작전회의에서 쥐었던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 일을 오래 하다보면 적들과도 회색지대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등을 맡길 정도로 믿지는 않지만, 필요한 만큼 서로를 이용하고, 경멸하지만 증오하지는 않는 거리에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최악의 상황에서 차악의 카드로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회색지대에 몇 사람이 들어오게 된다. 그 중 수다스러운 자들은 뒷골목에서 떠도는 소문과 전설을 늘어놓았다. 작은 활약이 드라마틱한 무용담으로 어떻게 바뀌는지 주변에서 충분히 경험한 테디는 그 이야기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이야기는 인상적으로 남았다. 너무 터무니없어서.


'볼펜이었다니까요! 피자집 명함꽂이 옆에 꽂힌 볼펜을 쥐더니 순식간에 세 명을 해치우고 그 새끼들 총을 꺼내 남은 새끼들을 싸그리 죽였대요. 미키 새끼 그 좁아터진 가게에 30명을 몰아넣고 의기양양하더니 꼴좋게 됐죠. 그 사람에겐 비무장확인 같은 건 소용없어요. 주변의 아무거나 이용해서 다 죽여버리니까.'


애송이 마약 딜러의 허풍에 테디는 콧방귀를 뀌었었다.


'지미. 그 망할 피자집에서 다 죽었다면 누가 그 헛소리를 퍼뜨렸겠냐? 다 헛소문이지.


'올빼미의 눈이죠. 아무도 올빼미의 눈은 피하지 못해요.'


그밖에도 모두 합하면 나라를 살 수 있다는, 그 자의 목에 걸린 현상금과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상금을 걸었던 조직과 권력자는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철회했다는 소리를 딜러는 열심히 떠들었고, 테디는 지금까지 듣던 헛소리 중에 가장 황당한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무용담은 과장되고 허풍이 섞이기 마련이었지만 이 헛소리의 주인공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실제 인물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디는 여러 무용담과 소문을 하나로 뭉쳐 만든 유령이라고 판단하고 딜러의 열변을 한귀로 흘리며 무시했다.


그런데 그 유령이 작전의 목표물이라고 했다. 그것도 철두철미하기로 이름 높은 요원이 직접. 중무장한 전투 부대가 2개 중대나 투입되었고 전원에게 최첨단 장비가 지급되었다.


이번 컨테이너의 사각지대에도 이상은 없었다. 테디는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지나치게 얼어도 좆되는 거야, 지레 겁먹고 움츠러들면 비껴가던 악운도 들러붙게 마련이니까. 뻣뻣한 목을 좌우로 움직인 테디는 야시경의 옆을 터치해 시야모드를 바꿨다. 선명하고 깨끗한 흑백 화면에서 적외선 열화상 화면으로 변했다. 철제 구조물 너머 작은 생물까지 탐지할 수 있다더니 과연 컨테이너 바닥에서 재빠르게 이동하는 쥐가 보였다. 다시 시야모드를 조정하려고 손을 들던 테디는 섬찟한 기분을 느꼈다


억센 손이 입을 틀어막나 싶더니 목을 뭉툭한 얼음조각으로 문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테디는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입을 벌려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컨테이너 바닥에서 바쁘게 이동하는 쥐는 두 마리로 늘어났다. 어쩌면 정말 유령인지 모르겠다고 테디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테디의 목숨을 거둔 사신은 야시경에 열화상 영상을 남기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요원은 키보드가 부서질 듯 두드렸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분석요원은 거의 절망에 차서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타겟이 사라졌다. 위치를 확보할 수 없다. 반복한다. 빌어먹을 타겟의 위치를 확보할 수 없다. 선착장 반경 100미터 안에 있다고 판단된다. 왜냐고? 씨발. 거기에서 계속 아군의 생체신호가 끊기니까!


팀장은 책임자를 돌아보았다.


"교체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팀장은 상황실 데스크 교체를 명령했다.


"아직 실패한 적이 없었지?"


"이번에 호되게 경험하겠군요. 너무 자신만만했는데 좋은 경험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쉽게 풀리진 

않겠군요."


책임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각오했잖아. 2단계 실행해."


상공에서 빛줄기가 쏟아졌다. 카메라 반대쪽에 설치한 드론의 서치라이트가 일제히 작동하며 타겟을 수색했다. 잠시 후 드론의 프로펠러 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회전 소음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제시카는 헬기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작전 진행은 완벽했다.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신호가 떨어진 후 주변은 철저하게 탐색하며 전진했다. 작전은 간단했다. 목표물을 포위해서 포위망 좁히기. 시간대가 약간 불리했지만 저격에 필요한 야간 사거리와 그래서 좁혀지는 작전 범위를 생각하면 이쪽이 훨씬 유리한 작전이었다. 더구나 숲이나 산처럼 은신에 유리한 지대도 아니었다. 앞은 강이었고 뒤는 차도였다. 몸을 숨길 곳은 없었다. 항구의 건물과 컨테이너 역시 군사위성과 신개발기술을 적용한 열화상 카메라 앞에선 유리 상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타겟은 사라졌다


처음엔 수색대의 헬멧에 구별 표시가 되어있다는 걸 눈치채고 헬멧을 착용해 눈속임을 했나 싶었지만, 포위망을 좁히는 부대원 중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는 대원은 없다고 상황실에서 확인해줬다. 범죄자들이 말하던 소문이 사실이었나? 제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테디 만큼은 아니어도 제시카 역시 떠벌이는 무용담의 실체를 믿지 않았다. 더구나 범죄자들의 허풍이었다. 야시경은 지금까지 세 번의 작전에서 정말 유용했지만 인간이 만든 기술인 이상 헛점이 있을 수 있었다. 버그나 해킹이겠지. 그나마 기본적인 기능인 야시 성능이 탁월해서 다행이었다.


선두에 선 동료가 마지막 컨테이너 사각지대 점검을 끝내고 이상 없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경계 자세를 유지하며 앞으로 이동하는데 이어피스가 흔들렸다. 제시카는 오른손으로 소총을 들고 왼손으로 이어피스를 다시 고정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딱 다섯 걸음 앞섰던 동료 세 명의 시체를 발견했다. 사신의 시선을 느꼈지만 달을 등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다. 달빛에 반사되는 나이프를 보며 제시카는 깨달았다. 방어도, 공격도 불가능했다. 총신을 올릴 시간도 모자랐으니까.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한가지 뿐이었다.


AR15의 총성이 터졌다. 드론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더 분주해지고 무장 헬기는 고도를 낮췄다.


조명이 달빛을 가리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위치를 알리는 게 도움이 됐을까? 제시카는 흩어지는 숨을 모으며 들이쉬었다.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축소된 거였어. 진실을 알려줄 사람은 죽어서 말을 전하지 못했던 거야. 제시카는 숨을 내쉬었다. 문득 생각이 소총을 바닥에 대고 한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에 미쳤다. 반동이 꽤 셌을 텐데. 어깨가 탈골됐을지도 모르겠네. 숨을 다시 모았지만 물에 빠진 듯 공기가 몰려오지 않았다. 아깝다. 포상 휴가를 받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다 소용없구나. 채 모으지 못한 숨을 다시 내쉬며 제시카는 눈을 감았다.


 

 

 

컨테이너와 부두를 수색한 헬기는 요트 위를 돌며 수색했다. 헬기의 서치 라이트가 한 요트의 조종석에서 움직임을 포착했다. 부조종사 마이클은 무전으로 위치를 전달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면에서 바람이 밀려들어오더니 헬기가 추락했다. 옆을 보니 이마를 관통당한 조정사가 조종석에 축 늘어져있었다. 조종대를 잡고 헬기를 상승시키느라 정신이 없는 마이크는 요트의 남자가 스나이퍼 라이플을 겨누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남자는 위태롭게 회전하는 헬기의 보조연료탱크가 조준경에 들어오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요트에 부딪칠뻔한 위기를 넘기고 가까스로 헬기의 균형을 잡은 마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모두 내쉬기도 전에 퉁-하는 작은 진동을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헬기는 화염에 휩싸였다.


 

헬기는 수면에 닿기 직전 폭발했다. 그리고 그 화염 너머로 요트 한 척이 빠른 속도로 항구에서 벗어났다. 무전 소리가 어지럽게 엉키고 전투 대원들을 태운 모터 보트들이 그 뒤를 쫓았다. 

 

 

선착장에서 꽤 떨어진 부두 밑의 강물이 찰랑거렸다. 수면에서 고개를 내민 남자는 참았던 숨을 조용히 내쉬고 주변을 살폈다. 자동항법장치로 움직이는 요트를 추적하느라 소란스러운 선착장을 바라본 남자는 조용히 헤엄쳐서 거리를 더 벌렸다. 그리고 물에서 짐을 꺼내 조용히 부두 위에 올렸다. 커다란 밀폐 비닐에 넣은 배낭과 라이플 케이스였다. 부두 끝을 잡고 위로 올라온 남자는 허리 뒤에서 밀폐 비닐을 꺼냈다. 자동 권총을 비닐에서 꺼내 다시 허리 뒤에 꽂은 남자는 배낭과 라이플 케이스를 꺼냈다. 배낭을 열어 비닐들을 넣은 남자는 배낭과 라이플 케이스를 어깨에 걸쳤다. 후드티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남자가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이야."


양복을 입은 남자가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남자는 허리에 꽂았던 자동권총을 손에 쥐고 몸을 천천히 돌리면서 책임자를 겨눴다. 책임자의 곁에서 타겟을 확보했다고 알리던 팀장 역시 물에서 빠져나온 남자에게 총을 겨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총을 겨누고, 총구 앞에선 이 상황에서 마땅히 느껴져야 할 팽팽한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에 걸맞는 긴장감은 다른 요원들이 현장에 도착하고 타겟에게 총을 겨누고 나서야 조성되었지만, 그나마도 책임자가 주머니에서 추파춥스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책임자의 머리를 겨누던 타겟의 총구가 내려왔다. 복부를 다시 겨눈 타겟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더 나오지."


책임자는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했다.


"두뇌회전에 당분은 필수야. 그리고 요즘 운동부족이었고."


남자는 혀를 차더니 다시 총구를 내렸다. 슬개골을 겨눴다가, 주요 근육을 피해서 허벅지를 겨누더니 결국 한숨을 쉬며 총을 내리고는 다시 허리 뒤쪽에 꽂았다. 그런데 그때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났다. 주머니에서 또 밀폐 비닐을 꺼낸 남자는 그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휴대폰과 비닐을 주머니에 넣었다.


"사미르의 현상금이 취소됐어.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남자는 책임자의 턱선과 이마에 남은 접착제를 물끄러미 응시했고, 책임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쿠.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마이크도 한통속이었어?"


"받아야 할 빚을 이번에 받았다고 해두지.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있는데 열화상 카메라엔 어떻게 잡히지 않은 거야? 지금도 잡히지 않는다는데."


타겟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바로 저번 타겟이 보안과잉이었거든. 지금 당신이 쓰는 장비보다 아마 1.5세대는 업그레이드한 장비일걸? 그래서 나도 장비 좀 보강했지."


남자가 입은 옷을 툭툭 쳤다. 책임자는 그렇지 않아도 인상적인 차림새가 새삼스럽게 인상적이라는 표정을 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인데 얼굴도 안 보여줄 거야?"


입술을 뚱하게 하고 움직이지 않자 책임자는 재촉했다.


"? ?"


한숨을 쉰 남자가 후드를 뒤로 넘기자 책임자는 과장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세월은 너만 비껴가는군."


콧방귀를 뀐 남자는 턱에 맺힌 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책임자와 팀장을 응시했다.


"둘은 안 죽여. 하지만 다른 새끼들은 아냐.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여기서 끝내."


뭔가 맥빠지는 대화의 흐름에 허탈해하던 전투대원들은 물벼락맞은 고양이같은 표정을 하더니 다시 남자를 

겨눈 총구를 바로했다.


책임자가 케이스를 흔들어보였다.


"오랫동안 찾던 거잖아. 거래하자, ?"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야. 그리고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12시간 안에 가져올 수 있어."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여상하게 말하는 말투가 이상하도록 설득력이 넘쳤다. 전투대원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책임자는 씩 웃더니 케이스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뻗었다. 주먹쥔 손 바로 아래에서 검은 강물결이 찰랑거렸다.


"손 편다."


남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시 찾기 힘들걸?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잖아. 물고기가 삼키기라도 하면 곤란할 텐데."


남자가 불만스럽게 목을 울렸고, 책임자는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를 띠었다.


"뭘 원해?"


"알잖아."


다시 불만스러운 소리가 울렸고 책임자는 싱글거리며 손을 남자에게 향했다.


"확인해볼래?"


남자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됐어. 당신은 재수없는 새끼지만 사기꾼은 아니니까."


"그것 참 영광이군."


책임자는 내용물을 다시 케이스에 넣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날 끌어들인 걸 후회할 거야."


"No risk, no return."


남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채울래?"


"소용이 있기는 하나?"


"그럴리가."


전투대원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책임자는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히 도발하지 마. 이래뵈도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최정예요원들이라고."


"흐음"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주머니에 양손을 꽂았다. 만약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관찰력과 그것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남자의 얼굴에 잠깐 떠올랐다 사라진 표정을 두고 악마의 심술궂은 미소라고 칭하며 그에 대한 대서사시를 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건 남자의 표정을 보고 어쩐지 어제 고양이를 길들이는 방법을 다룬 책을 읽고 우리에 뛰어든 멍청이를 보는 호랑이 같다고 생각하다 몸서리를 치는 전투대원 C뿐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불행히도 지나치도록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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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 샘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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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D-3



 

세상이 온통 붉었다. 마치 화염에 타들어간 시체의 살이 갈라져 드러난 심장처럼 새빨갰다. 브랫은 까마득한 어두움 속으로 추락하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한계를 넘긴 몸이 비명을 질렀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놓고 쓰러져 눈을 감아버리고만 싶었다. 피와 땀이 들어가 쓰린 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어두워진 세상을 거칠게 날뛰는 심장 고동 소리와 숨소리가 뒤흔들었다. 멸망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 그리고 전부를 잃고, 마침내 최후의 심판의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지금까지 해야 했던 고생과 희생,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헛수고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친 전사가 된 기분이었다.

 

헐떡일 때마다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날뛰는 숨을 누르며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자 냄새가 밀려왔다. 옆에 강이 흐르는 낡은 건물 냄새였다. 축축한 먼지 냄새, 서늘하고 눅눅한 시멘트벽 냄새, 시큼한 곰팡이 냄새, 습기를 머금고 가라앉는 화약 냄새, 그리고 피 냄새.

 

충격에 밀려 잠시 뒤로 물러섰던 현실이 성큼 몰려왔다.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고 분노가 저주받은 불길처럼 브랫의 온몸을 휘감았다. 증오와 절망과 수치심이 예리한 얼음 비수가 되어 소용돌이쳤다. 유능한 경호요원은 눈을 부릅뜨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있는 배신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달려들어 짐승처럼 포효하며 찢어버리고 싶은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이 거짓이기를,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악몽이기를, 그래서 여전히 소중한 연인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비참했다. 구질구질했다. 하지만 증오하고 부숴버리기엔, 거짓과 배신이었다고 가차없이 잘라내기엔 브랫에게 지난 사흘은 너무도 애틋하고 소중했다. 현실과 간절한 바람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고 브랫은 절망을 곱씹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마음은 어느새 매달리고 있었다. 거짓이어도 좋았다. 빤히 보이는 얕은 핑계여도 상관없었다. 변명만 해주면 못이기는 척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랫은 이런 스스로가 너무 비참했지만 지난 사흘은 너무나도……

 

그랬다. 사흘. 단 사흘이었다. 벼락처럼 나타나 점령군처럼 마음에 들어오고, 브랫의 영혼을 차지하고, 마침내 세상을 뒤흔들어 바꾸는데 사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브랫은 그렇게 기적처럼 찾아온 연인의 배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어떤 변명이든 해주기만 한다면 믿을 수 있다는 간절한 바람과 함께 브랫은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이었다.

 

보고 싶지 않아도 생명을 끊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경호에 대비해야 하는 일종의 직업병이었으니까. 급소를 노린 상처는 기계처럼 정확했고, 그 어떤 망설임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기꺼이 속을 준비가 되어있는 브랫에게 현실은 어디까지나 잔인했다. 그래도 브랫은 속고 싶었다. 이 광란의 살육 현장이 어떤 오해이기를, 결백한 연인이 터무니없는 함정에 빠진 것이기를 간절하게 기원했다. 하지만 마침내 시선이 마주친 순간 브랫은 현실을 인정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눈 속엔 브랫이 찾고자 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고한 피해자의 당혹도, 공포도, 공황도, 믿어달라는 호소도, 애원도 그 아무 것도 없었다. 있다면 인생의 울타리 밖 타인을 바라보는 듯한 무감한 시선뿐이었다.

 

얼음물 양동이를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 것도 아니었어. 그래,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였어. 브랫은 입술을 깨물었다. 함께 하는 내일을 향해 조금씩 내딛는 그 한 걸음이 얼마나 어려웠고, 얼마나 치열한 고민의 무게가 실렸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런 것 따위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저항하고, 항복하고, 무릎 꿇고, 무참하고 아름다운 정복자의 발 앞에 바친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알 바 아니었던 것이다. 함께하는 내일을 꿈꾸며, 행복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순서가 늦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설레며 입맞추던 마음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속수무책으로 내보인 진심을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미련에 잠시 발목이 잡혔던 분노가 사슬을 끊고 다시 날뛰었다. 소중하고 애틋했던 만큼 증오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브랫을 몰아세웠다. 턱까지 차오르는 진흙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격렬한 감정이 브랫의 등을 떠밀었다. 원인을 없애버리면 미칠 것 같은 이 분노와 증오와 후회와 수치심이 사라질까? 저 새끼가 사라지면 지난 사흘간의 기억도, 감정도 사라질까? 다시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눈에 들어간 피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타오르는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힘겹게, 하지만 단호하게 걸음을 뗐다. 오직 증오의 힘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다려.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감정적으로 나갈 일이 아니야. 이 일의 첫 번째 규칙 잊었어? 프로잖아.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마.

 

이성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브랫은 입술을 비틀었다.

 

지랄, 프로는 사람 아니냐? 해탈한 성인이라도 돼?

 

이성에 반발하며 다시 걸음을 떼자 이성은 더욱 엄격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의뢰인을 패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브랫은 콧방귀를 뀌었다.

 

말은 바로 하시지? 의뢰인은 패터슨이야. 저 새끼가 아니라.

 

자고로 프로란 디테일을 챙기는 법. 브랫은 계약의 정확한 사항을 지적했고, 이성은 맥락을 건너뛰고 분절된 파편을 들이미는 브랫에게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브랫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확고하게 걸음을 뗐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저 잘난 얼굴에 한방은 먹여야 앞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야!

 

브랫은 코끝을 실룩거렸다. 지금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브랫 본인의 이성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지적하면 지금 이 상황은 약간, 아니, 상당히 괴상한 자아분열 역할극이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브랫은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얼빠지는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어이없었다.

 

보호? 보오호오?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그 보호? 지금 그 보호를 저거한테 해야 한다는 소리야? 분위기 전환용 농담이야? 아니면 반어법인가? 냉손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아무리 내가 하는 소리라지만 이건 어떻게 변명을 해줄 수 없을 정도로 유머 감각이 끔찍하군.

 

브랫은 걸을 때마다 발이 거치적거려 짜증을 냈고, 이성은 발에 채이는 시체를 물끄러미 보며 입을 다물었다. 브랫은 빈정거렸다.

 

보호를 해야 한다면 저 새끼한테서 세상을 보호하면 보호했지 저 새끼를 보호? !

 

확실히 그랬다. 지금 이 상황은 만약 사신이 협동체제가 아니라 일인사업이라면, 국제 노동 기준은커녕 제3국 노동환경에도 미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 고소를 고려할 정도로 대학살의 수라장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의 주범을 가리켜 보호 대상이라고 지칭하는 건 이보다 더 부적절할 수 없기는 했다. 이성은 멋쩍어서 헛기침을 했고, 브랫은 냉정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죽이든, 후려치든, 멱살을 잡든, 속에서 날뛰는 이 감정을 폭력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이성은 다급해져서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대로 커리어를 날릴 셈이야? 네 기준을 스스로 무너뜨리겠다고?

 

그 지적에 브랫은 걸음을 멈추었다. 승기를 잡은 이성은 얼른 말을 이었다.

 

이번엔 어떤 핑계도 대지 못해. 네가 완벽하게 네 뜻으로 한 선택이니까. 다시는 스스로를 믿지 못할 거야.

 

그 지적은 브랫의 가장 아픈 구석을 정확하게 찔렀다. 기억의 창고 가장 깊은 곳에 묻었던 장면이 되살아났다. 눈앞에서 의뢰인이 피를 뿜으며 고꾸라지던 장면이었다. 브랫이 개인적으로 깊이 혐오하던 작자였다. 그 사건 이후 브랫은 지옥을 경험했다. 혐오와 경멸이 경호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주제에 경호를 계속해도 될까.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간을 보내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그대로 평생 쓸모 없는 쓰레기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전선에서 무능한 장교들 명령대로 굴러야 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그 두려움은 브랫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브랫은 철칙 한 가지를 세웠다. 의뢰인에게 호의든 혐오든 사적인 감정을 가지지 말 것.

 

어떻게 보면 이번엔 실패한 셈이지만 아직 루비콘 강을 건넌 건 아니었다. 돌이킬 수 있었다. 감정을 누르고 비즈니스적인 거리까지 물러서면 된다. 브랫은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공기와 함께 밀려드는 대학살의 냄새는 신경써서 무시했다. 그리고 이성의 목소리를 따랐다.

 

지금 널 집어삼키는 감정 대신 이 일을 무사히 마친 다음 얻을 보상을 생각해봐.

 

브랫은 상상했다. 마침내 마당에 당당하게 자리잡을 존더크라프트파르조이크181, 일명 티거의 모습을. 마당을 상상하니 현재 엉망이 된 집 꼬락서니가 자동연상되었지만, 이왕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으니 패터슨에게 복구비용은 물론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철저하게 청구하는 상상으로 마무리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마음이 진정됐다. 이 일이 끝나면 휴가를 길게 떠나는 것도 괜찮겠지. 브랫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계획했던 호화로운 휴양지 대신 사막으로 떠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패터슨에게 부탁해 티거도 운반하고 직접 가동하는 거야. 힘차게 전진하는 티거의 엔진소리를 상상하니 기분이 상당히 근사해졌다. 이제 저 새끼가 배신자든, 심지어 매국노라고 해도 철저한 비즈니스의 미소를 띠고 사무적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브랫은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서 감정을 지우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힘차게,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디디고,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지극히 프로세셔널하지 못한 감정을 한껏 실은 주먹을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둘렀다.

 

주먹과 얼굴이 충돌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리고 저속한 의사표현이 바로 뒤를 이었다. 다양한 의사표현 중에서 특히 종교인의 금욕맹세의 불성실한 수행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유전적 이유와 관계간의 권력불균형 때문에 많은 문화권에서 금기시하는 근친상간에 관한 심도 높은 고찰이 돋보였다. 그 의견들을 경청하며 브랫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사흘 동안 마음에 담고, 애간장을 끓여가며 사랑했던 사람은 브랫이 껍데기에 홀려 멋대로 착각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요란하게 부서지며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브랫의 커리어가 박살나는 소리였다. 스스로 정한 금기를 자기 손을 깬 대가는 호되게 치르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브랫은 후회하지 않았다. 괜찮은 척, 사무적으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그게 불가능할 정도로 마음은 컸고, 그래서 이 망할 새끼가 비웃음을 터뜨렸을 때,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양호한 반응이지. 아니, 오히려 총을 꺼내 쏘지 않고 주먹만 날린 스스로의 자제력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욕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레퍼토리가 어찌나 다양한지, 중복 항목 없이 메들리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랑의 종말에 이보다 더 적합한 BGM이 있을 수 있을까? 브랫은 다채로운 욕설의 향연 속에서 지난 사흘 동안 고민하고, 용기 내고, 욕심 내고, 쭉 각오했던 혼자뿐인 내일이 아닌 함께 하는 내일을 꿈꾸며 설레던 감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디오스, 내 사랑. 내 눈 먼 환상이 만들었던 만큼 넌 지독하게 아름다웠고, 나만을 위한 운명 같았지. 널 만나기 위해 태어났고, 네가 기다리고 있기에 지금까지의 인생이 그렇게 좆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헛소리였지. 이 꼬라지를 보라지. 영원히 가지지 못할 축복을 미련스럽게 탐낸 멍청이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이 아닌가? 망할 인생. 어리석은 브랫 콜버트. 멍청한 새끼야.

 

비탄에 빠진 브랫은 비장하게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심술궂은 운명을 저주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절규할 법도 한데 브랫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했다. 세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마냥 운명을 원망하고 저주하기엔 운명은 이미 충분히 경고를 하고, 주의를 주고, 심지어 피할 기회까지 줬기 때문이었다. 그걸 굳이 다 뿌리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자기합리화까지 해가며 자기 발로 시궁창에 철벅철벅 걸어 들어간 건 브랫 자신이었다. 심지어 그뿐인가? 만약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서 사흘 전, 아니 이틀 전으로라도 되돌아간다면 과연 현명하게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을 할까? 브랫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러지 않으리라는 데 티거의 엔진을 걸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브랫은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서리쳤다. 본인의 멍청함과 한심함과 구질구질한 미련과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하고, 확고하고, 단호하고, 절대적인 취향과 외형중시 가치관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알아도 고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끔찍했다. 지금 브랫의 심정은그냥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눈앞에서 쫙 편 후, 검지랑 중지를 빼고 나머지 손가락을 오므린 다음 그대로 눈을 푹 찌르고 싶었다. 왜 왼쪽 눈뿐이냐면, 이렇게 호되게 당했으니 다음부턴 얼굴에 홀려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게 될 거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들을 때, 오른손을 들어 남은 눈도 찔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있는 힘껏 때렸는데 얼굴 어디가 찢어져서 흉이라도 남으면 어떡하냐고 안절부절못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라고 묻는다면 우물쭈물 말을 돌리다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아니, 어쩌면 레테 강물을 마시고 나서도 똑 같은 짓을 반복할지도 몰랐다. 브랫은 이런 스스로가 정말 싫었다.

 

창고 밖에선 푸르스름하게 깔렸던 땅거미가 밤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도시의 강은 묵묵히 흘렀다. 검은 수면 위로 달이 잘게 부서졌다. 마치 산산조각난 브랫의 순정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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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랫네잇 브랫네이트 




마이크는 당황했다. 군인 인생 최고의 위기를 이 유능한 중위가 안겨주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침실 사정을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이 어떤 비약을 거쳐야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지 상식인 마이크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안방 사정을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이 왜 부모의 생식기관이 만나야 내가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이 되지? 심지어 황새가 아기를 물고 온다는 설의 신봉자라고? ? 아니, 일단 물리적으로 무리 아닌가? 3개월 미만 태아라면 모를까, 3킬로그램이 넘는 신생아를 황새가 부리로 물어서 운반할 수 있나? 애초에 독수리가 아닌 황새라는 점에서 정말로 조류가 인류의 신생아를 배달한다고 믿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 거 아닌가? 아니, 정말로 배달한다고 쳐. 그럼 겨울이 생일인 인간은 없어야지. 이송과정 도중에 모두 저체온으로 사망했을 테니까!

 

마이크는 당황했다. 소대원들도 당황했다. 그리고 중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소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중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성교육을 인체로 설명해야 하나, 암술과 수술, 그리고 꿀벌로 설명해야 하나 막막하다는 표정이었다. 소대원들은 기막혔다. 진짜 막막한 쪽이 누군데! 아무리 경애하고 존경하는 소대장이지만 이 적반하장에는 항의하고 싶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애매함을 담은 중위의 시선이 에스페라와 매니멀에게 머물었다. 표정이 오묘해졌다. 매니멀은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포크는 알 수 있었다. 저 표정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중위의 눈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그렇게 틈만 나면 같이 음담패설을 했으면서 소대원들에게 쾌락과 생식의 연결고리를 알려주지 않은 까닭은 소대원들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네들은 뻐꾸기를 키우는 붉은머리오목눈이이기 때문인가?’ 터무니없는 오해에 포크의 말문이 막혔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중위의 표정이 애잔해졌다. 에스페라의 안에서 복장이 터졌다.

 

아니었다.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딸들의 정통성과 아내가 부부간의 정절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려고 에스페라가 막 숨을 들이마신 순간, 중위가 크리스테슨을 보면서 말했다.

 

크리스테슨. 나중에 애인이랑 잘 때, 가만히 누워서 미국을 생각하면 안 돼.”

 

그 진지한 조언에 크리스테슨의 흔들리는 눈빛만큼이나 소대원들의 멘탈도 요동쳤다. 당신! 바로 직전까진 그나마 우리를 성행위와 생식행위를 연결하지 못하는 멍청이 취급했잖아! 이젠 떡도 칠 줄 모르는 멍청이 취급을 하는 거야! 이러다 용맹한 해병들의 성지식은 빅토리아 시대의 레이디 수준까지 떨어질 지도 몰랐다.

 

너의 상식과 나의 상식 사이에 차원의 벽이 존재하는 중위를 보며 절망하던 소대원은 브랫을 보며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브랫은 중위의 저런 비상식적인 논리의 비약마저 매력이라는 듯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틀렸다. 저 두 사람은 답이 없다.

 

사실 이제서야 말이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그렇게 노골적으로 욕망과 열정을 이글이글 불태웠던 주제에 종전까지 떡을 치지 않은 이유는 중위가 소대장으로서 책임감과 자제심을 느꼈기 때문이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중위가 눈치가 없어서라고 소대원 모두가 생각했다. 중위는 눈치가 없었다. 성장과정과 교육과정, 그리고 정신건강에 의문을 느낄 정도로 눈치가 없었다. 직접적인 말로 하지 않은 상대의 신호를 제대로 수신한 적이 없었고, 말로 한다고 해도 동문서답을 하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에이를 말하고 를 말하고 를 말하면 다음은 가 나와야 하는데 중위는 사인, 코사인, 탄젠트의 값을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중위의 눈치의 가장 큰 피해자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브랫이었는데, 중위가 저렇게 눈치 없이 굴 때마다 치를 떨기는커녕, 자기네 동네는 떡치면 애가 생기는데 부자 동네에선 황새가 애를 물고 오냐고 중얼거리는 트럼블리의 입을 막는 걸 보니, 중위가 답이 보이지 않는 만큼 브랫 역시 절망적이었다. 어쩌면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졌는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워하며, 소대원들은 중위를 보며 눈에서 꿀을 뚝뚝 흘리는 브랫을 보며 치를 떨었다.

 

구원을 갈구하는 소대원들의 시선이 3분대 분대장 로벨에게 몰렸다. 그래 마지막 희망은 3분대였다. 3분대는 소대에서 지식수준과 교육수준, 그리고 독서율이 가장 높은 분대였다. 로벨은 학자금 지원 때문에 입대했고, 닥은 대학을 나왔고, 스타이니는 여동생이 하버드에 다니고, 테런은 시간만 나면 책을 잃고, 밥티스타는 2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자였다. 그러니 3분대가 아는 선현의 지혜와 현대의 지식이 우리를 이 위기에서 구할 것이다. 그러니 살려줘!

 

로벨은 소대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담긴 시선에 잠시 부담스러워했지만, 신중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중위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로벨은 언제나 중위에게 정중했다.

 

중위님께서 굳이 나서실 필요 없이 저 새끼가 다시는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 저희가 알아서 조져놓겠습니다.”

 

소대원들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거야? 겨우? 고작 겨우 그거라고? 어린애들처럼 우우 몰려가서 쟨 우리 친구 애인이니까 괜히 수작부리지 마!’ 이렇게 머릿수로 찍어 누르라고? 이거 하이틴무비, 아니, 요즘엔 디즈니 어린이 드라마에서도 여주인공의 찌질한 남자친구랑 어울려 다니는 멍청한 패거리가 전학 온 남주인공한테 하는 짓 아냐? 이게 최선이야? 정말로? 과거와 현대의 지혜와 지식이 교차해 내놓은 최고의 답이 고작 이것인가? 해병이 해병다울 수 있도록 해병을 돌보시는 해병의 신이시여, 여기 이 해병들을 버리시나이까? 소대원들은 깊은 회의에 빠졌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 방법이 유일한 해결책이기는 했다.

 

소대장을 보라, 그 어떤 용사가 있어 본래의 목적이 어떠하든 실제로는 동서애자 처벌 근거로 이용하는 DADT가 서슬 퍼런 군대 안에서 게이치정드라마를 찍으면 안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현실을 차원의 벽을 넘고 시간과 공간의 미로를 빠져나가 소대장에게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소대원들은 중위에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브라이언이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쉬퍼가 따로 없군.”

 

소대원들은 생각했다. 과연. 책은 세상을 담고 있다더니 군대내 동성간 연애와 견제, 치정 때문에 고통 받는 군인들을 일컫는 말이 이미 있었구나. .. 윗니와 아래 사이 혀가 날카롭게 떠있다가 맞물렸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붕 뜨는 그 말, 쉬퍼. 그래, 우린 쉬퍼였구나. 불분명한 생각과 모호한 감정은 단어와 말을 만나 구체적이 되고, 선명해지고, 따로 떨어진 혼자에서 벗어나 연대하게 된다. 쉬퍼. 우리는 쉬퍼였어. 단어가 남기는 씁쓸한 여운을 곱씹는 소대원들의 귀에 스타이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다른 쉽을 위협하는 쉬퍼 말이죠.”

 

해병들은 불안해졌다. 쉬퍼라는 단어가 묶어준 이 연대감과 위안은 번지수가 틀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픽션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사람인 경우에도 쉽 적용이 되나?”

 

테런이 말했다. 소대원들의 불안감은 더욱 깊어졌다.

 

내가 들었는데, 기자 양반이 기사를 묶어서 책으로 낸다고 했으니까, 그때 팬덤이 형성되면 가상과 현실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서 적용이 되지 않을까?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면 배우를 거치니까 그땐 더 수월하고.”

 

밥티스타가 대답했다. 소대원들은 가장 지적인 분대의 심도 높은 토론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저 저들이 말하는 용어의 정확한 뜻은 우리가 짐작한 뜻과 아무 상관없을 뿐만이 아니라, 진실한 뜻을 알게 되면 깊은 영혼의 상처를 입으리라는 불길한 예감만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결국 신심 깊은 크리스토퍼가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그런데, . 쉬퍼가 무슨 뜻이에요?”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정은 깊은 브라이언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쉬퍼는 특정 캐릭터 두 사람 사이의 케미스트리를 열광하는 사람들인데 드라마 내용과 상관 없이 두 사람은 사귄다고 믿고, 때로는 자기들이 설정한 케미 관계에 방해가 되는 캐릭터를 배척하기도 하고, 자신이 미는 캐릭터와 다른 캐릭터로 케미설정을 하는 다른 쉽팬덤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지. 지금 같은 경우엔 우리는 중위님과 브랫 쉬퍼로서 두 사람의 애정 관계를 지지하고, 그에 방해가 되는 저 새끼를 적대시-“

 

대단히 학구적인 표정으로 진지하게 설명하던 브라이언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옆에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던 로벨이 얼어붙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개졌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스타이니도, 테런도, 밥티스타도 굳어버렸다. 3분대원들은 모두 말은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더니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자기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을 담은 자기 머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브라이언의 설명은 불필요할 정도로 간단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소대원들은 방금 자기가 들은 말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지웠다. 더불어 인생을 함께할 수 없는 끔찍한 진실이었으니까.

 

3소대원들은 거의 스스로 목을 조를 것 같은 반응을 보였고, 소대원들은 너희 머릿속의 그것을 다시는 세상 밖으로 꺼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와 함께 종전과 함께 후유증이 찾아온 것처럼 그들을 대했다. 그래. 힘내라. 너희만 그런 거 아닐 거야. 전쟁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니까.

 

결국 책임을 질만한 힘이 있는 자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혀. 브랫은 난처해하기는커녕, 차마 좋다고 대놓고 드러내지 못해 입술을 실룩거리는 중이었고, 포크는 세상을 지배하는 백인들이 멍청하므로 세상은 엉망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고 이 모든 상황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담느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이크는 아직도 깊은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로벨은 머릿속에 담은 특정 지식이 부끄러워 구덩이를 파고 드러누울 기세였다.

 

이 모든 혼란과 공포와 낙담의 소용돌이를 소대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관통했다.

 

우릴 지지하는 자네들 마음은 고맙지만 이 문제는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야.”

 

소대원들은 정색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런 적 없었다. 절대로! 물론 두 사람을 아끼고 존경했다. 다시 강조하자면 중위는 무아파키아 이후 소대원들에겐 어떤 종교의 영역이었다. 멍청한 중대장이 명령불복종을 핑계로 중위를 계속 물고늘어지면 경력에 불이익을 당하더라고 증인으로 나설 생각이었고,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중대장 음식에 설사약을 섞을 결사대로 조직할 수 있었다. 소대원들은 진지했다. 이들에게 중위는 이런 존재였다. 그리고 브랫은 거의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감각으로 소대원들을 몇 번이나 살렸다. 모두는 두 사람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목숨을 빚졌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특히 군인들에게 목숨 빚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훌륭한 소대장과 뛰어난 분대장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만약 부정하는 자가 있다면 소대원들은 그 자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죽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군인으로서 두 사람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과 두 사람을 사적으로 하나의 관계로 묶어 인정하고 지지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아주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만약 두 사람이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는다면, 소대원들은 분노할 것이다. 매우. 그리고 식장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분노한 버팔로떼처럼 식장으로 몰려가 결혼식 역사상 가장 극성스럽고 야단스러운 하객이 되어 요란법석 축하할 것이고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군대에서 만났으니 군대식 세레머니를 해야한다고 우기면서 예검으로 아치를 만들어 세이버아치를 하라고 종용할 것이다. 그래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순간을 위해 예검에 녹이 슬지 않게 꾸준히 관리할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두 사람이 눈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걸 인정하고 지지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소대원들은 생각을 멈췄다. 피곤과 혼란이 밀려들었다. 지지와 인정이란 무엇일까? 철회와 부정을 반복하다 보니 지지와 인정이라는 뜻에 게슈탈트붕괴가 올 지경이었다.

 

소대원들은 두 사람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좀비 바이러스 창궐이든 외계인 침공이든, 세상이 뒤집히고 난리가 나는 상황에서 지휘와 명령에 복종하고 앞서 달리는 등을 보며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저 두 사람이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믿고 따를 수 있는 저 두 사람은 왜 하필이면 서로 연애해서 우리가 이런 시련을 겪게 하는가? 아니, 연애까지는 좋다. 왜 대놓고 해서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가! 이런 소대원들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브랫을 응시하며 이글거리는 중위의 눈은 이라크의 태양 못지 않았다. 브랫 역시 무슨 기대를 하는지 볼을 살짝 붉혔다. 정신건강이 좋지 않은 광경이었다. 중위가 한 걸음 다가서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지자, 소대원들의 마음에 폭풍이 일고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브랫. 와식이 다이어트 약을 세 통 더 구해다 준다고 했어요. 제이로가 살아있다는 거 알고 기분이 좋아서 아주 요즘 선심을 팍팍 쓰더라고요.”

 

레이를 보며 브랫이 그게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 눈을 부라렸지만 레이는 더없이 진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먹으려고요. 전우의 성의인데 쓸모 없이 만들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전에 약이 떨어져서 존나 우울해하면서 깨달았는데, 역시 사람은 속에 맺힌 거 없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털어놓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론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속에 쌓아놓지 말고 그냥 다 말하려고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마음의 병 아니겠어요.”

 

언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고 생각한 것은 브랫 뿐만이 아니었지만 레이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약도 먹고, 존나 하이한 김에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감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아니 백, 천까지 전부 털어놓으려고요. 물론 브랫에게 말이죠. 표정이 왜 그래요? 네가 내 분대장인데 너한테 털어놓지 그럼 누구한테 털어놔요? 아무튼 이제는 아침부터 새벽까지, 깨어있을 때도, 처자빠져 잘 때도 대기할 때도, 이동할 때도, 귀환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뛰어난 통신병이자 훌륭한 운전병이 무슨 생각을 하나, 이 전쟁이 이 새끼한테 어떤 영향을 끼쳤나 브랫이 걱정하지 않게 머릿속 전부와 마음속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브랫한테 털어놓을게요. 카페인의 가호와 전우애의 이름 아래! Oorah!”

 

레이가 브랫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네 주둥이가 내 심기를 건드리면 내 주둥이는 너를 좆되게 하리라. 탁월하고 효과적이고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예수는 겟세마니 동산에 올라 인간의 아들로서의 최후의 밤을 보내며 지난 3년이 30년처럼 느껴진다고 지치고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런데 레이는 하루를 십 년처럼 느끼게 할 수 있었다. 부대 안에서, 그것도 파병지에서, 복수심에 불타 작정한 레이를 어떻게, 또 어디로 피할 수 있단 말인가! 브랫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선 브랫은 거의 절박하게 말했다.

 

걱정마십쇼, 중위님. 이제 다른 새끼가 제 눈에 차겠습니-“

 

엉겁결에 진실을 말해버린 브랫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얼버무렸고, 소대원들은 일제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했다. , 저 얼빠새끼. 수치심을 모르는 저 고백에 중위님께서 오히려 창피해하시-

ㄹ리가 없지. 그래.

중위를 돌아본 소대원들은 입을 실룩거렸다. 중위는 조금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저 표정은 불은 뜨겁고, 물은 축축하고 나는 잘생겼다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좀 재수없었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보고 왜 당연하지 않다는 듯 비굴하게 굴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건 너무 쪽팔린 짓이었으니까. 목을 가다듬은 브랫이 다시 말했다.

 

저 새끼가 더위를 먹었나 봅니다. 헛수작부리지 말라고 제가 조져놓겠습니다.”

 

브랫을 올려본 중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네가 나서면 괜히 가학심이랑 승부욕을 자극할 수 있어.”

 

저건 또 무슨 정신 나간 헛소리- 아니지. 화들짝 놀랐던 소대원들은 발언자가 중위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표현을 순화했다. 저것은 또 어떤 크나큰 뜻을 품어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는 대담한 의견이란 말인가! 그 의문은 브랫을 바라보는 중위의 녹아 내릴듯한 눈이 설명해주었다. ‘넌 섹시하고 귀여우니까.’ 브랫은 다시 얼굴을 붉혔고, 해병들은 영혼으로 부르짖었다. 해병을 돌보시는 해병의 신이시여! 어째서입니까! 섹시는 이해하려고 혀를 깨물고 눈을 찌르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어찌됐든 저 녀석은 근사한 해병이니까요. 하지만 귀라니오! 그것도 승부욕과 가학심을 자극할 정도로 귀라뇨! 저 키에! 저 덩치에! 인상 쓰면 존나 살벌한 저 새끼가 귀여라니오! 어째서입니까? 우리 멋진 중위님께서 남자 중의 남자시기 때문입니까? 존나 센 알파메일인데 좀 지나치게 센 알파메일이시기 때문에 중위님의 눈엔 저 새끼가 귀여로 보이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해병을 돌보시지만 어쩐지 우리를 버리신 듯한 해병의 신이시여. 부디 마지막으로 부디 중위님께서 보시는 세상을 저희는 영영 모르게 하소서!

 

결국 이 모든 게 너 때문이다! 너만 허튼 짓을 하지 않았다면! 소대원들은 원망을 담아, 네이트의 주장에 따르자면 브랫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해병을 일제히 노려보았다. 해병은 얼굴이 그을려 더 희게 빛나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미백치약 광고 같은 모습이었다. 여긴 서핑하며 헌팅하는 관광지 해변이 아니고 파병지이고 부대안이라는 사실을 우리만 신경 쓰는 걸까? 소대원들은 어때서 고통은 상식 있는 자들의 몫인가 그 부조리함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저 해병이 수작을 부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대흉근이 발달한 가슴을 자랑하는 것 같은데가슴 자랑이라니. 소대원들은 그 같잖은 수작이 참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해병이었다. 게다가 정예인 해병수색대였다. 저 정도 근육에 감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가슴자랑이라니. ! 소대원들은 비웃었다. 가슴을 따지자면 2소대에 넘쳐나는 게 훌륭한 가슴이었다. 일단 루디를 필두로 매니멀과 테런이 있었다. 게다가 가슴하면 브랫도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이왕에 가슴 이야기가 나온 김에 까놓고 말하자면, PT셔츠 차림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벗지 않아서 실물 그 자체를 본 적은 없지만, 실루엣만 봐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중위님 가슴도 뛰어-

 

소대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생각을 멈췄다. 왜 우리가 사내새끼들과 한 분의 가슴을 품평하고 자빠졌지? 하도 호모에로틱이 창궐하다보니 우리도 물들었나? 이것도 다 저 새끼 때문이야. 다시 한번 원망을 담아 원흉을 노려보는데, 그 해병은 소대원들이 어쩐지 그럴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제발 하지 말라고 기원했던 짓을 기어코 저질렀다.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지나가던 해병에게 카메라까지 빌려서!

 

중위가 음산하게 목을 울리는 소리가 소대원들에겐 마치 멸망의 4기수가 부는 나팔소리처럼 들렸다.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해병이 가까이 오고, 얼굴에 떠올린 웃음을 더 깊게 하며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을 때, 기어코 그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브랫의 턱을 틀어쥔 중위는 그대로 끌어당겨 입맞췄다. 다가오던 해병은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고, 소대원들도 얼어붙었고, 바람도 얼어붙었고, 시간도 얼어붙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반사적으로 중위의 뒤통수를 감싸 쥐려고 손을 올렸던 브랫이 소대원들 눈치를 보면서 어정쩡하게 손을 공중에 허우적거렸지만 소대원들에겐 조금의 위안도 되지 못했다.

 

충분한 시간 동안 입술만 부딪쳤다 뗀 중위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브랫에게 말했다.

 

내가 서류를 잘못 가져왔군. 선적하려면 빨리 작성해야 하니까 따라와, 브랫.”

 

브랫과 함께 왔던 길로 멀어지는 중위를 보며 소대원들은 유능한 소대장이 작성서류를 착각하는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무엇을 하려고 저렇게 두 사람만 가는지 정말 알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소대원들은 부서진 정신을 수습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재앙이 일어났지만 다행히 입술만 닿았다 떨어졌다. 성인 등급이 아닌 아동관람가능 등급이었다. 이런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깊게 생각하면 비참해지니까 다행인 건 다행인 거라고 생각하며 소대원들은 그 문제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파피가 발등에 부상을 입어 후송되었지만, 소대장은 소대원들을 전원 살렸다. 코커처럼 경력에 먹칠을 칠한 소대원들도 없었다. 소대장은 책임을 훌륭하게 완수하고 본분을 다했으니, 우리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소대원들은 너는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으니 고발할 것도 없고 소문을 퍼뜨릴 것도 없다고 협박하러 아직도 굳어있는 해병에게 건들건들 몰려갔다.

 

유명한 아이스맨과 역시 그 유명한 데드맨워킹의 주인공인 픽 중위와 같이 사진을 찍으면 복무기간 내내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을 것 같아서 시선이 마주쳤을 때 호감을 사려고 웃고, 전우에게 카메라를 빌려 행운의 부적으로 삼을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가 깊은 영혼의 상처를 입은, 순결하고 무고한 해병에게.

 

 

 

 

그 새끼가 정말 저한테 추파를 던졌습니까?”

 

정말 궁금해?”

 

단추가 풀린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흥분하기 시작한 성기를 드로즈 위로 쥐자 낮게 신음을 토했다.

 

생각해보니 상관없는 것 같군요.”

 

네이트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날카롭게 숨을 들이키며 브랫은 얼른 대답을 정정했다.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제야 네이트는 만족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성기를 부드럽게 누르며 문질렀다. 눈을 감고 잔잔하게 일어나는 쾌감을 음미하던 브랫이 눈을 뜨고 네이트를 마주보았다. 그러더니 네이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 끌어당기더니 손목 안쪽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간질이듯 혀끝으로 문지르더니 이내 혀를 세워 끝으로 쿡쿡 찔렀다. 어젯밤을 떠올린 네이트는 움찔거리며 항문을 조였다.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서늘한 새벽 공기와 손등을 물어도 새어 나오던 신음, 그리고 차가운 정적 속에서 유독 크게 울리던 젖은 소리와 예민한 주름을 적시며 녹이던 뜨거운 혀. 네이트가 가슴을 들썩거리며 뜨거운 숨을 토하자 씩 웃은 브랫은 혀를 길게 내밀어 네이트의 손바닥을 핥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인내심을 잃은 네이트는 다른 손으로 브랫의 뒤통수를 쥐고 끌어내려 성급하게 입맞추며 타액으로 젖은 손을 브랫의 드로즈 안으로 집어넣었다. 뜨겁고 단단한 성기를 쥐자 브랫이 네이트 바지의 단추를 풀고 손을 집어넣어 엉덩이를 감싸 쥐었다.

 

바지 주머니에 루브랑 콘돔 있어.”

 

맞닿은 입술을 속삭이자 브랫이 웃었다.

 

또 전투연대 애들한테서 강탈하신 겁니까?”

 

해병은 되게 하지만 수색하면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열매를 마다할 이유는 없지.”

 

브랫은 악동이 공범자에게 웃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과연 제가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지휘력을 지니신 분답습니다.”

 

루브로 축축해진 손가락이 조금씩 밀려들어오자 네이트는 숨을 내쉬며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귀관의 기대에 계속 부응할 수 있도록 계속 정진- !”

 

아직 길이 만들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브랫은 유능한 해병답게 목표물을 정확하게 찾았다. 짜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이 하얀 불꽃이 되어 날카롭게 터지는 것 같았다. 소리 없는 신음을 뱉으며 크게 벌린 부드러운 입술을 만족스럽게 내려보던 브랫이 부드러운 입술을 장난스럽게 물었다 놓으며 속삭였다.

 

저 역시 언제나 중위님께서 자랑스러워 하실 수 있는- 흐읏!”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를 마주 대고 비비자 브랫이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손가락이 성급하게 밀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통증과 저릿저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에 헐떡이던 네이트가 브랫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돌아가면 너랑 호텔 잡고 나흘은 나오지 않을 거야.”

 

굵고 긴 손가락 세 개가 한꺼번에 들어오자 쇳소리를 내며 몸을 굳히는 네이트를 달래듯 정수리에 키스하며 브랫이 웅얼거렸다.

 

일주일로 연장하십쇼.”

 

그 말에 네이트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통증을 잊고 키득거렸다. 그리고 손을 뒤로 돌려 브랫이 루브와 함께 쥔 콘돔을 찾아내 껍질을 벗기고 브랫의 성기에 씌웠다. 팔을 브랫의 목에 두르고 탄탄한 어깨에 이를 세우자 브랫이 네이트에게 보내는 사랑 그 자체처럼 주체할 수 없이 크고 뜨거운 열기가 조심스럽게 밀려들었다.

 

네이트, 크읍, , 씨발. 네이트. …, 괜찮습니까? 아프지 않아요?”

 

쾌감에 들떠 열이 오른 눈이 세상 전부를 담듯 네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이트는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자기를 사랑하고, 애타게 원하는 이 다정하고 겁 많은 남자가 사랑스럽고 안타까웠다. 네이트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죽을 수도 있는 이 남자는 자기에게 사랑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아무도 끝까지 사랑을 나누며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줄 거라고 믿지 않았다. 더 없는 사랑과 간절함과 그리고 포기를 담은 그 눈을 보며 네이트는 브랫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들어 무릎으로 브랫의 허리를 문질렀다. 그러자 브랫이 혀를 깊게 섞으며 네이트의 무릎 아래로 팔을 끼우며 허리를 움직였다. 고통은 뜨거운 열기로 변하고 이내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쾌락으로 변했다.

 

네이트는 물론 소대원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을 모두 살렸고, 경력에 오점을 남기게 하지도 않았다. 전선에서 소대장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의무 중 최우선순위를 무사히 완료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네이트는 현재의 최우선순위에 집중하기로 했다. 작전과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정확한 우선순위 선정은 중요했으니까. 게다가 이 문제는 성공한 인생을 사느냐, 덜 성공한 인생을 사느냐 문제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느냐, 아니면 평생 불완전한 기분을 느끼며 사느냐 문제였다.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같은 확신을 가지고 같은 미래를 함께 보기를 원했다. 브랫이 지금 이 순간을 두 길이 잠시 만났다 다시 각자의 길로 갈라지는 교차점이 아니라, 두 길이 만나 하나의 길로 이어지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주기를 원했다. 나와 네가 아닌, 우리라고 생각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브랫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면 되니까. 그래서 현재 네이트의 최우선순위는 <멜팅 아이스맨 프로젝트>였다. 조금 전처럼 네이트가 소유욕에 안달이 난 철부지처럼 굴 때, 브랫이 기뻐하고 만족하고, 그리고 안심한다는 사실을 네이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그렇게 브랫이 조금씩 안심하고, 마음속 얼음이 녹아 네이트의 옆자리가 자기 자기라는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네이트는 얼마든지 더할 수도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진심이었으니까. 소대원들과 그리고 아마도 무고할 그 해병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우선순위는 무엇보다 우선이기 때문에 최우선순위였고, 네이트는 중요도 순위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엘리트이자 훌륭한 장교였으니까.

 

모두의 사정과 속내와 꿍꿍이와 오해를 내려보며 이라크의 태양은 여전히 뜨겁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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