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2
#1. D-10
밤바람이 서늘했다. 도시의 항구는 평소 빽빽하게 자리잡은 배들로 혼잡스러웠지만 오늘밤에 정박한 배는 요트 몇 대뿐이었다. 어두움 속에서 길게 뻗은 선착장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수천 달러는 훌쩍 넘겨 보이는 수트를 입은 초로의 남자는 단단히 다문 입술 끝을 고집스럽게 아래로 내린 퉁명한 표정이었다. 남자는 유난히 선이 유려한 요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던 남자는 걸음을 돌려 선착장 끝을 향했다. 그리고 흐르는 강을 응시했다.
강 물결 소리와 요트가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심야의 정적을 흔들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밤이었다. 강을 바라보던 남자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얼굴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냉혹한 분위기는 남자가 딛고 선 재력이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반지나 커프스단추를 담는 작은 케이스였다. 악마에게 팔아버린 영혼에게도 떨칠 수 없는 회한이 남을 수 있을까? 케이스를 보며 남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남자의 그런 모습을 조준경이 담았다.
미동없는 남자의 머리를 중심점이 잡았을 때, 조준경 안에서 남자가 움직였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다시 무언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였다. 남자는 종이를 펴더니 들어 보였다. 조준하는 저격범에게 잘 보이도록.
<네가 찾던 물건 이 안에 있어.>
남자는 케이스를 흔들어 보였다. 돌발사태였다. 하지만 저격범은 당황하지 않았다. 은신처에서 여전히 타겟을 조준하며 이 상황이 함정일 경우 빠져나갈 퇴로를 다시 계산했다.
양복을 입은 남자는 주머니에서 다른 종이를 또 꺼내 펼쳐 보였다.
<거래를 제안하지.>
조준경 속에서 남자는 자기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얼굴을 뜯어냈다. 아니, 가면을 벗었다. 얼굴을 확인한 저격범은 혀를 찼다. 스나이퍼 라이플을 거둔 저격범은 캐리어에 총을 넣고 지퍼를 채웠다. 그리고 배낭을 집어 들었다.
"순순히 응할까요?"
방탄 조끼를 입고 자동권총을 든 젊은 요원이 다가왔다. 양복을 입은 남자는 무심하게 말했다.
"쉽진 않겠지."
"그렇겠죠."
젊은 요원은 이어피스를 누르며 명령했다.
"상황 보고해."
-타겟 위치 파악. 11시 방향 500미터. 컨테이너 위.
-반경 2Km 통제 완료.
요원이 바라보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원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시작해."
선착장 옆으로 잠수함 한 대가 부상했다. 선체 옆 출입구가 열리며 선착장과 이어지는 다리가 되자 중무장한 전투대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항구를 바깥쪽에서 포위했던 전투 부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론 수십 대가 포위망을 좁히는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컨테이너 위에서 몸을 일으킨 저격범은 공중에서 위치를 고정하는 드론을 흘낏 보고는 저격소총 캐리어와 배낭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핸드폰의 버튼을 누르더니 지면으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본부 상황 분석실은 인간의 편의보다는 기계의 안전을 우선시해 온도가 서늘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모니터들은 항구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항구와 주변을 보여주는 모니터들 중 흑백의 낮은 해상도로 항구를 보여주던 모니터가 갑자기 블루스크린을 띄웠다. 분석 요원은 카페인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자 모니터는 흰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항구에선 드론이 예리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상공에 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드론 일부가 하강하더니 수색견처럼 항구 곳곳을 낮게 비행했다. 그리고 드론의 짐벌에 고정된 열화상 카메라는 모든 상황을 촬영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본부에 전송했다.
분석요원은 다시 키보드로 명령어를 입력했다. 그러자 화면에 빈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입체설계도를 연상시키는 건물과 구조물의 뼈대와 인간의 열적외선 이미지만 띄웠다.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미지엔 독특한 표시가 있었다. 전투대원들은 헬멧에, 선착장에 있는 책임자는 수트 자켓에, 그 옆에 있는 팀장은 방탄 조끼에 모두 X마크가 선명했다. 표식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분석요원은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타겟이 2-A포인트로 이동했다. 반복한다, 타겟이-"
요원은 말을 멈췄다. 얼굴을 찡그리고 다시 키보드 조작을 했다. 명령어를 몇 번을 다시 입력하고 카메라를 이동시켰다.
막 컨테이너 모퉁이를 돈 테디는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바뀌었다. 진녹색 배경에 흰색 외곽선으로 보이던 세상이 실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진행 방향을 알려주던 화살표가 사라졌다. 야간투시경이 VR모드에서 통상 모드로 전환된 것이다. 젊은 요원들과는 달리 테디는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인공위성과 드론의 카메라가 찍은 영상을 분석해 주변을 디지털 도면화하고 타겟과 대원들의 위치를 분석해 각자의 최단 거리를 화살표로 안내해주는 시스템이 편리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꼭 마리오네트가 되는 기분이 들어 다른 나이 든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테디도 유쾌하지 않았다. 기술의 발달은 지금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존 야시장비보다 시야가 선명해지는 것으로 충분했다.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 운명을 좌우하는 건 최첨단 장비가 아니라 필드에서 경험으로 익힌 감이라는 게 테디의 신념이었다.
상황실에서 알려준 지점에 타겟은 없었다. 테디는 사방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다음 컨테이너의 사각지대를 향했다. 컨테이너에서 직선으로 떨어져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속을 걷고 있노라니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서 혼자 움직이는 기분이 들어 묘하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VR모드 후유증인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테디는 아무리 비현실적이어도 오늘 작전의 타겟만큼 비현실적인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몇 시간 전 테디는 하마터면 작전회의에서 쥐었던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 일을 오래 하다보면 적들과도 회색지대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등을 맡길 정도로 믿지는 않지만, 필요한 만큼 서로를 이용하고, 경멸하지만 증오하지는 않는 거리에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최악의 상황에서 차악의 카드로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회색지대에 몇 사람이 들어오게 된다. 그 중 수다스러운 자들은 뒷골목에서 떠도는 소문과 전설을 늘어놓았다. 작은 활약이 드라마틱한 무용담으로 어떻게 바뀌는지 주변에서 충분히 경험한 테디는 그 이야기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이야기는 인상적으로 남았다. 너무 터무니없어서.
'볼펜이었다니까요! 피자집 명함꽂이 옆에 꽂힌 볼펜을 쥐더니 순식간에 세 명을 해치우고 그 새끼들 총을 꺼내 남은 새끼들을 싸그리 죽였대요. 미키 새끼 그 좁아터진 가게에 30명을 몰아넣고 의기양양하더니 꼴좋게 됐죠. 그 사람에겐 비무장확인 같은 건 소용없어요. 주변의 아무거나 이용해서 다 죽여버리니까.'
애송이 마약 딜러의 허풍에 테디는 콧방귀를 뀌었었다.
'지미. 그 망할 피자집에서 다 죽었다면 누가 그 헛소리를 퍼뜨렸겠냐? 다 헛소문이지.
'올빼미의 눈이죠. 아무도 올빼미의 눈은 피하지 못해요.'
그밖에도 모두 합하면 나라를 살 수 있다는, 그 자의 목에 걸린 현상금과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상금을 걸었던 조직과 권력자는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철회했다는 소리를 딜러는 열심히 떠들었고, 테디는 지금까지 듣던 헛소리 중에 가장 황당한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무용담은 과장되고 허풍이 섞이기 마련이었지만 이 헛소리의 주인공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실제 인물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디는 여러 무용담과 소문을 하나로 뭉쳐 만든 유령이라고 판단하고 딜러의 열변을 한귀로 흘리며 무시했다.
그런데 그 유령이 작전의 목표물이라고 했다. 그것도 철두철미하기로 이름 높은 요원이 직접. 중무장한 전투 부대가 2개 중대나 투입되었고 전원에게 최첨단 장비가 지급되었다.
이번 컨테이너의 사각지대에도 이상은 없었다. 테디는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지나치게 얼어도 좆되는 거야, 지레 겁먹고 움츠러들면 비껴가던 악운도 들러붙게 마련이니까. 뻣뻣한 목을 좌우로 움직인 테디는 야시경의 옆을 터치해 시야모드를 바꿨다. 선명하고 깨끗한 흑백 화면에서 적외선 열화상 화면으로 변했다. 철제 구조물 너머 작은 생물까지 탐지할 수 있다더니 과연 컨테이너 바닥에서 재빠르게 이동하는 쥐가 보였다. 다시 시야모드를 조정하려고 손을 들던 테디는 섬찟한 기분을 느꼈다.
억센 손이 입을 틀어막나 싶더니 목을 뭉툭한 얼음조각으로 문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테디는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입을 벌려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컨테이너 바닥에서 바쁘게 이동하는 쥐는 두 마리로 늘어났다. 어쩌면 정말 유령인지 모르겠다고 테디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테디의 목숨을 거둔 사신은 야시경에 열화상 영상을 남기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요원은 키보드가 부서질 듯 두드렸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분석요원은 거의 절망에 차서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타겟이 사라졌다. 위치를 확보할 수 없다. 반복한다. 빌어먹을 타겟의 위치를 확보할 수 없다. 선착장 반경 100미터 안에 있다고 판단된다. 왜냐고? 씨발. 거기에서 계속 아군의 생체신호가 끊기니까!
팀장은 책임자를 돌아보았다.
"교체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팀장은 상황실 데스크 교체를 명령했다.
"아직 실패한 적이 없었지?"
"이번에 호되게 경험하겠군요. 너무 자신만만했는데 좋은 경험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쉽게 풀리진
않겠군요."
책임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각오했잖아. 2단계 실행해."
상공에서 빛줄기가 쏟아졌다. 카메라 반대쪽에 설치한 드론의 서치라이트가 일제히 작동하며 타겟을 수색했다. 잠시 후 드론의 프로펠러 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회전 소음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제시카는 헬기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작전 진행은 완벽했다.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신호가 떨어진 후 주변은 철저하게 탐색하며 전진했다. 작전은 간단했다. 목표물을 포위해서 포위망 좁히기. 시간대가 약간 불리했지만 저격에 필요한 야간 사거리와 그래서 좁혀지는 작전 범위를 생각하면 이쪽이 훨씬 유리한 작전이었다. 더구나 숲이나 산처럼 은신에 유리한 지대도 아니었다. 앞은 강이었고 뒤는 차도였다. 몸을 숨길 곳은 없었다. 항구의 건물과 컨테이너 역시 군사위성과 신개발기술을 적용한 열화상 카메라 앞에선 유리 상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타겟은 사라졌다.
처음엔 수색대의 헬멧에 구별 표시가 되어있다는 걸 눈치채고 헬멧을 착용해 눈속임을 했나 싶었지만, 포위망을 좁히는 부대원 중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는 대원은 없다고 상황실에서 확인해줬다. 범죄자들이 말하던 소문이 사실이었나? 제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테디 만큼은 아니어도 제시카 역시 떠벌이는 무용담의 실체를 믿지 않았다. 더구나 범죄자들의 허풍이었다. 야시경은 지금까지 세 번의 작전에서 정말 유용했지만 인간이 만든 기술인 이상 헛점이 있을 수 있었다. 버그나 해킹이겠지. 그나마 기본적인 기능인 야시 성능이 탁월해서 다행이었다.
선두에 선 동료가 마지막 컨테이너 사각지대 점검을 끝내고 이상 없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경계 자세를 유지하며 앞으로 이동하는데 이어피스가 흔들렸다. 제시카는 오른손으로 소총을 들고 왼손으로 이어피스를 다시 고정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딱 다섯 걸음 앞섰던 동료 세 명의 시체를 발견했다. 사신의 시선을 느꼈지만 달을 등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다. 달빛에 반사되는 나이프를 보며 제시카는 깨달았다. 방어도, 공격도 불가능했다. 총신을 올릴 시간도 모자랐으니까.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한가지 뿐이었다.
AR15의 총성이 터졌다. 드론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더 분주해지고 무장 헬기는 고도를 낮췄다.
조명이 달빛을 가리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위치를 알리는 게 도움이 됐을까? 제시카는 흩어지는 숨을 모으며 들이쉬었다.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축소된 거였어. 진실을 알려줄 사람은 죽어서 말을 전하지 못했던 거야. 제시카는 숨을 내쉬었다. 문득 생각이 소총을 바닥에 대고 한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에 미쳤다. 반동이 꽤 셌을 텐데. 어깨가 탈골됐을지도 모르겠네. 숨을 다시 모았지만 물에 빠진 듯 공기가 몰려오지 않았다. 아깝다. 포상 휴가를 받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다 소용없구나. 채 모으지 못한 숨을 다시 내쉬며 제시카는 눈을 감았다.
컨테이너와 부두를 수색한 헬기는 요트 위를 돌며 수색했다. 헬기의 서치 라이트가 한 요트의 조종석에서 움직임을 포착했다. 부조종사 마이클은 무전으로 위치를 전달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면에서 바람이 밀려들어오더니 헬기가 추락했다. 옆을 보니 이마를 관통당한 조정사가 조종석에 축 늘어져있었다. 조종대를 잡고 헬기를 상승시키느라 정신이 없는 마이크는 요트의 남자가 스나이퍼 라이플을 겨누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남자는 위태롭게 회전하는 헬기의 보조연료탱크가 조준경에 들어오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요트에 부딪칠뻔한 위기를 넘기고 가까스로 헬기의 균형을 잡은 마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모두 내쉬기도 전에 퉁-하는 작은 진동을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헬기는 화염에 휩싸였다.
헬기는 수면에 닿기 직전 폭발했다. 그리고 그 화염 너머로 요트 한 척이 빠른 속도로 항구에서 벗어났다. 무전 소리가 어지럽게 엉키고 전투 대원들을 태운 모터 보트들이 그 뒤를 쫓았다.
선착장에서 꽤 떨어진 부두 밑의 강물이 찰랑거렸다. 수면에서 고개를 내민 남자는 참았던 숨을 조용히 내쉬고 주변을 살폈다. 자동항법장치로 움직이는 요트를 추적하느라 소란스러운 선착장을 바라본 남자는 조용히 헤엄쳐서 거리를 더 벌렸다. 그리고 물에서 짐을 꺼내 조용히 부두 위에 올렸다. 커다란 밀폐 비닐에 넣은 배낭과 라이플 케이스였다. 부두 끝을 잡고 위로 올라온 남자는 허리 뒤에서 밀폐 비닐을 꺼냈다. 자동 권총을 비닐에서 꺼내 다시 허리 뒤에 꽂은 남자는 배낭과 라이플 케이스를 꺼냈다. 배낭을 열어 비닐들을 넣은 남자는 배낭과 라이플 케이스를 어깨에 걸쳤다. 후드티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남자가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이야."
양복을 입은 남자가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남자는 허리에 꽂았던 자동권총을 손에 쥐고 몸을 천천히 돌리면서 책임자를 겨눴다. 책임자의 곁에서 타겟을 확보했다고 알리던 팀장 역시 물에서 빠져나온 남자에게 총을 겨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총을 겨누고, 총구 앞에선 이 상황에서 마땅히 느껴져야 할 팽팽한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에 걸맞는 긴장감은 다른 요원들이 현장에 도착하고 타겟에게 총을 겨누고 나서야 조성되었지만, 그나마도 책임자가 주머니에서 추파춥스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책임자의 머리를 겨누던 타겟의 총구가 내려왔다. 복부를 다시 겨눈 타겟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더 나오지."
책임자는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했다.
"두뇌회전에 당분은 필수야. 그리고 요즘 운동부족이었고."
남자는 혀를 차더니 다시 총구를 내렸다. 슬개골을 겨눴다가, 주요 근육을 피해서 허벅지를 겨누더니 결국 한숨을 쉬며 총을 내리고는 다시 허리 뒤쪽에 꽂았다. 그런데 그때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났다. 주머니에서 또 밀폐 비닐을 꺼낸 남자는 그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휴대폰과 비닐을 주머니에 넣었다.
"사미르의 현상금이 취소됐어.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남자는 책임자의 턱선과 이마에 남은 접착제를 물끄러미 응시했고, 책임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쿠.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마이크도 한통속이었어?"
"받아야 할 빚을 이번에 받았다고 해두지.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있는데 열화상 카메라엔 어떻게 잡히지 않은 거야? 지금도 잡히지 않는다는데."
타겟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바로 저번 타겟이 보안과잉이었거든. 지금 당신이 쓰는 장비보다 아마 1.5세대는 업그레이드한 장비일걸? 그래서 나도 장비 좀 보강했지."
남자가 입은 옷을 툭툭 쳤다. 책임자는 그렇지 않아도 인상적인 차림새가 새삼스럽게 인상적이라는 표정을 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인데 얼굴도 안 보여줄 거야?"
입술을 뚱하게 하고 움직이지 않자 책임자는 재촉했다.
"응? 응?"
한숨을 쉰 남자가 후드를 뒤로 넘기자 책임자는 과장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세월은 너만 비껴가는군."
콧방귀를 뀐 남자는 턱에 맺힌 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책임자와 팀장을 응시했다.
"둘은 안 죽여. 하지만 다른 새끼들은 아냐.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여기서 끝내."
뭔가 맥빠지는 대화의 흐름에 허탈해하던 전투대원들은 물벼락맞은 고양이같은 표정을 하더니 다시 남자를
겨눈 총구를 바로했다.
책임자가 케이스를 흔들어보였다.
"오랫동안 찾던 거잖아. 거래하자, 응?"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야. 그리고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12시간 안에 가져올 수 있어."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여상하게 말하는 말투가 이상하도록 설득력이 넘쳤다. 전투대원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책임자는 씩 웃더니 케이스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뻗었다. 주먹쥔 손 바로 아래에서 검은 강물결이 찰랑거렸다.
"손 편다."
남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시 찾기 힘들걸?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잖아. 물고기가 삼키기라도 하면 곤란할 텐데."
남자가 불만스럽게 목을 울렸고, 책임자는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를 띠었다.
"뭘 원해?"
"알잖아."
다시 불만스러운 소리가 울렸고 책임자는 싱글거리며 손을 남자에게 향했다.
"확인해볼래?"
남자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됐어. 당신은 재수없는 새끼지만 사기꾼은 아니니까."
"그것 참 영광이군."
책임자는 내용물을 다시 케이스에 넣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날 끌어들인 걸 후회할 거야."
"No risk, no return."
남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채울래?"
"소용이 있기는 하나?"
"그럴리가."
전투대원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책임자는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히 도발하지 마. 이래뵈도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최정예요원들이라고."
"흐음"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주머니에 양손을 꽂았다. 만약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관찰력과 그것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남자의 얼굴에 잠깐 떠올랐다 사라진 표정을 두고 악마의 심술궂은 미소라고 칭하며 그에 대한 대서사시를 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건 남자의 표정을 보고 어쩐지 어제 고양이를 길들이는 방법을 다룬 책을 읽고 우리에 뛰어든 멍청이를 보는 호랑이 같다고 생각하다 몸서리를 치는 전투대원 C뿐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불행히도 지나치도록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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