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eirdy M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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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치는 밤이었어요. 커다란 배는 무력한 나뭇잎처럼 시커먼 바다 위에서 요동치고 있었죠. 선체는 위태롭게 기우뚱거리고, 뱃사람들은 로프를 당기고, 소리를 지르며 분노한 바다에서 배를 지키려 필사적이었어요. 그런데 이 소동이 벌어지는 배의 한복판에서 브랫 왕자는 근사하게 몸을 쭉 펴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단단한 조각상처럼 한껏 폼을 잡고 서있었어요.


비상상황이라 모두 정신이 없는데 문짝처럼 거대한 작자가 딱 가운데 자리잡고 저러고 있으니 거치적거리기가 이를 데 없었죠. 우락부락한 뱃사람들이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겨도 브랫 왕자는 끄떡없었어요. 신경 쓰지 않았죠. 왜냐면 지금 브랫 왕자의 모든 신경은 검은 수면 위로 동그랗게 솟아난 작은 머리를 향하고 있었거든요.


맞아요. 지금 브랫 왕자의 상태는 번식기를 맞아 암컷 새 앞에서 가슴을 한껏 부풀린 수컷 새 같은 상태였어요.

 

B국은 바디를 낀 작은 도시국가였어요. 지금은 양식업과 교역으로 제국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옛날에는 가난한 어촌이나 다름없는 나라였답니다. 그런데 브랫 왕자의 고조모께서 바다의 사악한 마법사를 굴복시키시면서 나라의 운이 활짝 피었답니다.


마법사는 복종의 의미로 B국의 바다는 천국 같은 평화가 함께 할 거라고 맹세했어요. 태풍과 사나운 어류가 피할 것이며, 수온과 플랑크톤의 밀도 역시 일정하게 유지될 거라고 했죠. 생각해보세요. B국의 양식장은 양식업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천국의 양식장이 됐어요. 변수가 발생하지 않고 항상성이 보장되는 양식장이어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동일 무게의 금과 맞먹는다는 비싼 조개의 완벽한 양식 조건이었거든요.


황제도 식탁에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고, 한번 먹어본 사람의 무덤 앞에서 조리하면 저승에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난다는 환상의 조개는 예민하고 까다로워 양식 자체가 불가능하고 채취할 수 있는 기간도 1년에 딱 보름 밖에 되지 않았죠. 그리고 B국은 그 보름 동안의 수입으로 1년을 버텼고요.

그런데 이제는 양식한 조개를 언제나 순풍이 푸는 해로를 통해 수출할 수 있게 됐죠. 여왕은 막대한 국익을 순식간에 쌓았답니다.


환상의 조개와 함께 국고를 채우는 쌍두마차는 진주조개였어요. B국의 조개는 다른 산지의 조개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크기와 영롱한 광택으로 인어의 눈물로 불리며 전세계 왕족과 귀족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이 됐죠.

몇 대를 이어 대책 없이 쌓이던 나라 빚을 말끔하게 청산한 날, 여왕은 이 기쁜 날을 축하하기 위해 진주로 기념품을 만들라고 명령했어요. 상황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어요. 마땅하다면 마땅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시츄에이션이었죠. 단지 문제는 그 기념품의 정체성이었어요. 여왕이 만들라고 명령한 건 다름 아닌 Codpiece, 즉 코드피스, 바로 고간주머니였거든요.


나라를 부유하게 일으킨 여왕이 하필이면 어째서 왜 코드피스 제작을 주문했을까를 두고 여러 가설들이 분분했어요. 그리고 두 가지로 정리됐답니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가진 여왕이 단 한 가지 갖지 못한 것을 선망해서 보상심리로 만들게 했다는 가설과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운 건 좆을 가진 남자가 아니라 바로 여자인 나라며 좆이 대단하긴 뭐가 대단하냐며 조롱하려는 의도로 만들었다는 가설이었답니다. 하지만 진실은 오직 여왕 만이 알고 있겠죠. 불만은 후손에게 이어지고요.


여왕은 독특하다 못해 괴랄한 왕실 보물을 만든 것도 모자라 계승식을 마친 후계자는 성별을 불문하고 이 고간주머니를 착용해야 한다고 못박았죠. 그러니 필연적으로 이 진주고간주머니는 계승식에서 후계자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었죠. B국의 후계자들은 계승식이 다가오면 우울해졌어요. 그럴 수밖에 없죠. 다른 왕실의 후계자들은 예식에서 왕관이나 홀, 하다못해 브로치를 받을 때 B국의 왕위후계자는 고간주머니를 달아야 한다니까요.

다른 왕실의 예식에서 후계자가 금관을 물려받고 거만한 표정을 할 때, B국의 후계자는 세 명이 오른쪽, 왼쪽, 앞쪽에 쪼그리고 앉아 민감한 부위에 거의 코가 닿을 듯 밀착해서 빠르고 정확하게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꼴을 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를 해야 했답니다


후계자들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어쨌든 계속 사용하다 보면 수선을 피할 수 없는데, 비극은 여기에서 발생했죠. 원래 있는 진주를 죄다 떼어내도 시원찮을 판에 수선을 맡은 장인들은 왕실에 대한 존경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며 반짝이는 보석을 추가해버렸죠. 에메랄드, 사파이어, 루비 등등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보석의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브랫 왕자에 이르러서는 원래 있던 진주만 남기고 전부 뗀 다음, 가장 작은 알이 엄지 손톱만한 다이아몬드 수백 개를 빼곡하게 달아버렸죠.


생각해보세요. 걷거나 움직일 때마다 실외가 됐든, 실내가 됐든 빛이 있으면 그 빛을 상하좌우 360도 블링블링 트윙클 샤이닝 반사하는 그 참담한 비극을요. 차라리 왕관이면 좀 부끄럽고 말지, 고간주머니로 찬란발광 아몰레이드 반짝반짝 빛을 뿌리고 다녀야 하는 브랫 왕자는 섬세한 사춘기 시절 암굴에 은둔하는 구도자가 될까 진지하게 고민했답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고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괜찮아진다더니 왕위고 뭐고 전부 내던지고 가출하고 싶던 격렬한 수치심도 세월과 함께 옅어졌고, 얼마 전에 고간주머니 확장 보수를 해야 했을 땐 뿌듯하기까지 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저 아름다운 인어의 시선을 끄는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으니 왕자는 고간주머니가 만족스러웠어요. 수선할 때 주머니 가운데를 메추리알만한 다이아몬드로 장식하자는 의견을 거절했는데 아무래도 재고해봐야 할 것 같다고 브랫 왕자는 마음을 바꾸었죠.


 순항이 보장되는 해로는 어떻게 되고 왜 브랫 왕자가 탄 배가 폭풍에 휘말렸냐고 물으신다면 브랫 왕자가 준비된 상태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해서라고 답할 수밖에요. 아무리 바다의 마법사가 안전한 항로를 보장했다지만 타인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는 항로를 개척해서 나쁠 건 없었죠. 하지만 영해를 벗어나자마자 이런 심한 폭풍을 만나게 될 줄은 브랫 왕자도 알지 못했답니다.


 바다도 울렁거리고 배도 울렁거리고 브랫 왕자의 속도 울렁거렸어요. 뱃멀미였죠. 하지만 브랫 왕자는 뱃멀미를 인정할 수 없었어요. 뱃멀미에 시달리는 해상교역특화 도시왕국 왕자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타이틀이에요? 그래서 왕자는 돛대의 밧줄을 잡고 나는 바다와 함께하고, 바다는 나와 함께하니, 바다가 나고, 내가 바다로다, 그러니 멀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기기만을 시도했어요. 그리고 바로 그때 왕자는 인어를 발견했답니다.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에서 사람 머리가 쏙 나왔을 때, 왕자는 처음에는 배에서 떨어진 선원인가 싶었어요. 하지만 허우적거리지 않고 침착하게 배를 바라보는 게 이상했죠. 그래서 유심이 바라보는데 번개가 번쩍였고, 왕자는 보고 말았던 거예요. 어둡게 젖은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그리고 빛이 스며 투명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요.


 둘 사이의 거리가 꽤 있는데 어떻게 눈동자 색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단지 분명한 건 그 눈을 보자 가슴이 시린 것도 같고,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도 같고, 몽글거리는 뭔가로 꽉 채워지는 것도 같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이는 것도 같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업는 감정에 휩싸였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확실한 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순간처럼 자기를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 적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왕자는 바쁘게 할 일을 하는 뱃사람들의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멋있게 보이는 각도로 얼굴을 돌리고, 허리를 쭉 펴 거대한 맹수 같다는 평을 듣는 몸을 더욱 돋보이게 했죠. 그리고 인어가 눈을 떼지 못하는 고간주머니를 자랑하듯 쓰다듬으려다가 그건 좀 심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뒀죠.

 

그리고 왕자가 눈에 좀 더 힘을 주고 또렷하게 인어에게 시선을 주는 그때였답니다. 파도가 배를 덮치고 중심을 잃은 배가 암초에 부딪친 것이. 선체가 기우뚱 기울더니 배가 두 조각이 났어요. 그리고 왕자는 배의 파편과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어요.


 시야는 어두웠고, 물속에선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랜지 구분할 수 없었죠. 허우적거리는 손 너머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어요. 내심 인어인가 기대했는데, 나타난 건 사나운 기세로 입을 쩍 벌린 상어 두 마리였죠. 기대는 실망을 낳고, 실망은 분노로 이어졌답니다. 이 자리는 너새끼들이 아닌 그 사람 자리였어야 해! 이렇게 이를 갈며 왕자는 맨손으로 상어 두 마리와 사투를 벌였답니다. 이 상어들만 아니었으면 그 아름다운 인어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느새 이 상어들만 치우면 인어가 온다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바뀌었죠.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가 화끈해지더니 시야가 어두워졌어요. 배의 파편에라도 부딪친 걸까요?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가라앉는 몸이 엉킨 해류에 휘말려 돌려졌어요.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왕자는 인어의 하얀 얼굴을 본 것 같았어요.

 

 

*******

 

문득 정신이 들자 입 속에서 껄끄럽게 굴러다니는 모래가 느껴졌어요.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느껴졌죠. 손바닥 밑으로 모래가 만져졌고요. 해변으로 밀려왔나? 왕자가 천천히 눈을 뜨지 바로 얼굴 위로 빛을 등진 그림자가 보였어요.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푸른 하늘 사이로 인어의 얼굴이 보였죠. 왕자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어요.

 

네가 나를 살렸구나.

 

인어는 가만히 브랫 왕자를 응시하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고간주머니를 바라보았죠. 뜨거운 욕망이 느껴지는 그 시선에 브랫 왕자 역시 몸이 뜨거워졌죠. 손을 들어 인어의 얼굴을 감싸니 부드러운 서늘함이 느껴졌어요. 인어는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기울여 왕자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어요.

 

이름을 알려줘.

 

나다니엘.

 

생김새에 어울리는 단정하고 명료한 목소리였어요. 그리고 천사 같은 얼굴에 어울리는 이름이었죠. 천국의 아름다움이 내 앞에 있다고 왕자가 수작을 부리려는데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어요.


 퍼뜩 몸을 일으킨 인어는 바다로 달아나버렸답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인어가 푸른 바다로 사라진 순간 근위대장 에릭 코커가 부하들을 이끌며 나타났어요.


 충성심 강한 근위대장은 왜 왕자가 짜증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하지만 죽다 살아나서 놀라서 저러나 보다 이렇게 납득했죠. 참 선량한 사람이었어요. 이유 없는 타박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하루종일 시달린 브랫 왕자는 사람들을 다 물리고 혼자 저녁 노을로 물든 해변을 걸었어요. 나다니엘을 생각하니 그리움이 차올랐죠. 전설에서 인어공주는 왕자를 위해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이 됐다던데 나다니엘도 나를 위해 인간이 되어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왕자인 건 알까? 나를 만나러 여기 다시 왔다가 없는 걸 보고 실망해서 그냥 돌아가면 어쩌지? 임시거처를 마련해 죽 여기서 기다릴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정말 나다니엘이 나를 다시 찾아오기만 한다면 몇 년이든 기다릴 수-


, 브랫 왕자는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왕자의 얼굴에 떠올랐어요. 숨을 들이킨 왕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고 이내 바다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나다니엘에게 달려갔답니다. 두 다리로 비틀거리며 걷던 인어는 결국 중심을 잃고 왕자의 가슴으로 쓰러졌어요.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칼날과 바늘 위를 걷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전설이 떠오른 브랫 왕자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죠.

 

나다니엘. 맙소사, 나다니엘. 정말 너야?

 

왕자를 올려보며 인어는 입술을 달싹거렸어요. 하지만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아름다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죠. 역시 전설대로였어요. 바다의 마녀, 아니, 이 경우엔 마법사겠군요. 바다의 마법사는 나다니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대가로 다리를 준 거였어요. 나다니엘은 그렇게 얻은 다리로 걸음마다 따라올 끔찍한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브랫을 만나러 온 거죠. 단지 어제 만난 사이일 뿐인데. 아직 서로를 알지 못하고 막연한 호감만 가진 상태일 뿐인데.


 인어의 격렬하고 뜨거운 헌신적인 사랑에 브랫 왕자는 눈물을 흘렸어요.

 

널 실망시키지 않을게. 약속해, 나다니엘.

 

왕자는 망토를 벗어 인어의 알몸에 둘러주었어요. 그리고 위태롭게 발을 내딛는 나다니엘을 안아올리고 왕궁으로 향했죠. 왕자의 마음에는 인어를 향한 사랑과 고마움, 감동과 안타까움, 애틋함이 가득했답니다. 평생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주겠다고 신에게 맹세했죠.



 

그런데 나다니엘은 정말 브랫 왕자의 생각대로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순정 인어일까요?



 

설마 그럴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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