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Kill/Ordinary Days

나의 LT는 셰프를 꿈꾸는가 6

소심늘보 2015. 10. 19. 19:41


브랫네이트 네이트브랫 리버시블 




6.

 

아침 햇살이 눈꺼풀 위를 간질거렸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언제든 반응할 수 있도록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내가 있는 장소를 확인했다. 손바닥 아래로 스치는 감촉은… 침낭이 아니었다. 시트였다. 그제야 긴장을 푼 나는 천천히 기지개를 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부분에서 생소한 통증이 올라왔다. , 내가 밑이었지. 나른한 머릿속으로 어젯밤이 떠오르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어제 네이트와 나는 떡을 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섹스 포지션을 바꿨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신병훈련소 시절 이후 이렇게까지 몸이 녹초가 된 적은 처음이었지만, 뭉근하게 남은 열기는 만족스러웠고, 저릿한 여운은 안타까울 정도였다. 왜 진작 시도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들 정도로 몸이 만족스러웠지만 심리적인 만족은 더욱 컸다. 끝내주는 섹스를 한 다음 느껴지는 개운함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 그렇다고 개운하지 않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었다. 당연히 개운했다. 존나 개운했다. 단지 나는 평생 나를 짓누르던 문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겐 언제나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고 마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해결방법이 무엇인지도 잘 알면서 난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겁에 질려 문제를 그대로 짊어지고 관계에서 달아나기만 했었다. 그래서 그런 나를 혐오했다. 그 자기혐오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은 경멸과 증오가 사라질 날이 오리라는 것을 바라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제 나는 또다시 다가온 문제 앞에서 달아나지 않았다. 언제나와는 다른 선택을 했고, 그 결과 지금 나는 어쩌면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자기혐오의 늪에서 한 발자국이나마 빠져나온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앞으로 이 늪에서 점점 멀어지리라는 사실이었다. 네이트와 함께라면.

 

네이트를 생각하자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지금까지 나는  '좀 더 나은 나로 만들어주는 당신'이라는 건 머리가 꽃밭인 멍청이들에게 영화나 소설을 팔아먹으려고 사용하는 노골적인 상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비현실적이고 뻔한 거짓말에 속아서 돈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봐라. 그 비현실적인 행운을 차지한 운 좋은 새끼가 바로 나였다. 네이트가 아니었으면, 네이트가 없었으면 내가 과연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내가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설마.

 

가늠할 수 없는 사랑에 가슴이 벅찼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 이상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사랑은 한계를 모르고 커지는 감정이었다. 시트에 밴 네이트의 체취를 들이마시며 나는 팔다리를 퍼덕거리고 낄낄거리면서 침대를 구르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날이 되리라는 확신에 가득차서.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기는 했다. 결과적으론. 그랬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낯간지럽고 쪽팔리지만 내가 은밀하게 기대했던 로맨틱이나 무드가 조금도 없어서 그렇지 오늘 하루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지저스 뻐킹 크라이스트.

 

조금 뒤 내가 어떤 운명과 맞닥뜨리게 되는지 알 수 없던 나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운 기쁨과 행복에 감탄했다. 세상은 어제와 같을 텐데 내게는 더 이상 같은 세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의미 있고 새삼스러웠다. 작은 나무 테이블의 색이 저렇게 따뜻했던가? 푸른 하늘은 저렇게 선명했던가? 구름은 저렇게 부드러워 보였던가? 그리고 네이트는 저토록 아름다웠던가? 주방에 있던 네이트가 나를 돌아봤고,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이 기적 같았다. 우리는 운명처럼 만나 타는 듯한 감정이 서로 이어졌다. 끔찍한 시련을 넘어 마침내 손을 마주잡았고, 네이트는 그 손을 이끌어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자기혐오의 늪에서 한 걸음 나오게 만들어 주었다. 강한 의지를 담은 저 맑은 눈을 보고 어느 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시리도록 눈부신 이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사람이 내 사람이었다. 기적같은 이 사람이 사랑하는 자가 바로 나였다. 내 영혼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이 사람이 내 곁에서 나를 더 나은 나로 만들어주었다. 이 순간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본 나는 혼란에 빠졌다. 그건 살면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뭘까? 저건? 시커멓고 누르스름하고 불길한 연기를 피워내는 저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저런 것이 존재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막 있어도 되나? 뭐지? 무슨 외계 물질인가? 지옥에서 소환한 악마의 저주인가? 아니면 무슨 생체무기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저런 물질이 군사실험소나 위험물질 폐기 탱크에 있지 않고 프라이팬에 담겨 있는 걸까?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네이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볼이 살짝 상기된 그 모습을 보니 사랑스러움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리고 더없이 소중한 내 연인을 저 정체불명의 물질이 있는 이 위험한 곳에서 피신시켜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막 어깨를 감싸 안으려 팔을 뻗으려던 그 순간, 네이트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프렌치 토스트를 만들려고 했어.”

 

 

프렌치 토스트. 저게? 저걸 프렌치 토스트라고 불러야 한다고? 맙소사. 인간이 얼마나 창의성이 넘치고 세상을 증오해야 음식의 이름으로 저런 걸 만들 수 있는지 나는 깊은 혼란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졌다.

 

원래 팬케이크를 만들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

 

그제야 내 눈에 주방의 참상이 들어왔다. 싱크대는 숯덩이가 장악하고 있었고, 반죽이 말라붙은 그릇이 숯덩이 부대에 맹렬한 공격을 하고 있었다. 팬케이크 가루와 계란 껍질, 그리고 껍질을 깨다 떨어진 흰자와 노른자의 활약 역시 빠뜨릴 수 없었다. 주방의 참상과 프라이팬에 소환된 저주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나는 백만 달러를 들여 육성한 해병수색대였고, 참전 경험도 있는 노련한 고참이었다. 그래서 난 침착하게 현 상황을 파악했다.

 

저게 정말 팬케이크이고 프렌치 토스트라면(존재와 명명의 정당성 여부는 미뤄두고 일단 주장에 근거해서), 정말 그렇다면 저것들은 무슨 목적으로 제작되었을까? 저게 정말 음식이라면 존재 이유는 음식이었-씨발, 우리 적은 우리의 적이라는 엔시노맨도 아니고! 아무튼 저걸 먹으려고, 혹은 먹이려고 만들었겠지. 저것의 제작 목적이 분명해지자 난 맹렬한 자아 검열을 했다. 네이트가 왜 저런 걸 만들었을까? 나 혹시 뭐 잘못했나? 아무 이유 없이 저런 걸 만드는 사람은 없다. 저 따위 것을 만들 땐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대개 목표물에 긍정적이지 않은 효과를 기대한다. 현 상황에서 저런 걸 동원해야 할 정도로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하면 어젯밤 밖에 없었다. 혹시 네이트는 어제가 별로였나? 내가 만족스러웠다고 반드시 네이트도 만족스러웠을 거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런 건가?

 

의외로 네이트는 정치감각이 뛰어났다. 특히 엿먹으면 때를 기다렸다 최적의 순간 적을 후려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건 역시 어젯밤이 별로였다고 엄중한 경고를 하는 걸까? 아무리 사랑해도 나 같은 덩치를 안는 건 거부감이 드니 다시는 그런 악몽을 겪고 싶지 않다고 따끔하게 경고- 아니지, 그건 정말 아니지. 성큼 다가온 자학의 그림자를 네이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쫓아냈다. 자학하며 내 탓을 하려면 내 성격상 질리지도 않고 몇 년 동안 할 수 있었지만 네이트는 내가 가정한 상황에서 이런 수단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네이트는 예리하게 벼렸던 칼로 앞에서 심장을 찌르지 뒤에서 등을 찌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 되면 되게 만든다는 정신의 화신이었다. 만약 어제 포지션을 바꾼 섹스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마음에 들 때까지 탐색하고, 길을 찾고,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기어코 마음에 들도록 만들 인간이 바로 이 인간이었다. 그런데 딱 한 번하고 포기한다고? 게다가 이렇게 나한테 돌려서 표현까지 한다고? 돌려서 표현? 이 인간이? 퍽이나. 돌려서 말할 줄 아는 인간이면 얼마나 좋게?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연인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끔찍한 무드파괴자였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포지션을 바꾸자는 말이 결코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이런 경우의 수, 저런 경우의 수,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저렇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괜한 말을 꺼내 네이트가 내 눈치를 보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머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고민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이 인간이 뭐라고 했는지 아나? 왜 포지션을 바꾸자는 말을 꺼내지 않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자신감 확실하고 위풍당당한 네이트 님 왈-

 

그만두자. 이 인간이 이런 인간인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다. 감동은 감동이고 복장은 복장이니 이 특별한 날에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마땅할 기억을 굳이 떠올려 속 끓일 이유가 없지.

 

결론을 내자면 이 사태에 네이트의 다른 저의는 없었다. 불만도 없었고 경고도 없었다. 이건 그저 잠든 연(언제가 되어야 나를 이렇게 부르는 게 쪽팔리지 않을까?)을 위해 아침을 만들었는데 그 마음을 요리솜씨가 따라가지 못하는 가여운 남자가 벌인 작은 소동일 뿐이었다. 이 참상을 과연 요리솜씨가 없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순수하고 가벼운 말로 넘길 수 있나 하는 의문은 남지만 아무튼 네이트에게 다른 속뜻은 없었다. 그건 분명했고, 그것이 비극을 불렀다.

 

그런데 이것도 잘 안 되네. 잠깐 기다려. 이거 버리고 시리얼 준비할게.”

 

얼굴을 붉힌 네이트가 프라이팬을 개수대로 가져가는데 내가 그걸 막았다. 바보 같은 나새끼가 그걸 막았다. 왜 그랬냐, 이 새끼야!

 

그냥 먹겠습니다. 뭐 괜찮아 보이는데요.”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후회하리라는 건 잘 알지만 난 이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나를 좀 더 나은 나로 만들어준 아름다운 내 연인이 저렇게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데. 이 한 몸을 희생해서라도 의기소침해진 그 얼굴을 활짝 웃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그리고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해병수색대였다. 낙타똥을 베고 단잠을 잘 수 있는 노련한 해병수색대원이었다. 좀 실패한 음식을 먹는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무모한 자신감으로 가득 찬 나는 접시를 꺼내 프렌치 토스트라고 부르면 프렌치 토스트들이 집단 자살을 벌일 그것을 담고 포크로 베어 당당하게 입 속에 처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에 휩싸였다. 함부로 만용을 부려선 안 됐다. 이건 실패한 음식이라는 차원의 맛이 아니었다. 과연 해병은 전 해병이 되어도 해병이었다. 이것은 신속하고 정확하고 치명적으로 내 영혼을 파괴했다.

 

그리고 네이트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에게 하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했다.

 

어때?”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지독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그리고 멍청이들이나 사랑에 빠진다는 선현들의 경고가 괜히 이렇게 오랜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