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늘보 2016. 3. 21. 23:48

 


브랫은 초조했다. 목이 바싹 마르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장에라도 눈앞에서 조롱하듯 버틴 방해물을 부수고 싶었다. 방금 귀환한 해병은 보스톤의 작은 아파트 현관에 이마를 기댔다. 


 ‘뭐든 상대적인 겁니다.’ 눈을 감고 감정을 가라앉히던 브랫이 슬쩍 웃었다. 네이트는 교전이 시작되자 롤링스톤지 기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 모든 상황은 상대적일 수 있었다. 브랫은 동의했다. 미국에서 생각할 때, 이라크는 위험한 나라였지만, 교전상황에서 험비 바퀴 뒤에 몸을 숨긴다면 상대적으로 이라크는 안전한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시간은 무의미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지만, 전선에선, 특히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투지역에서 시간은 바싹 곤두선 신경이 시간의 양 축을 잡아 늘여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느리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 이론에 따르자면 언제 적의 저격수에 머리가 뚫려 죽거나, 언제 RPG포탄이 험비에 박혀 박살날지도 모르는 전선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돌아온다면 시간의 체감속도는 정상이 되어야 했다. 1초의 흐름은 1초처럼 느껴져야지 이렇게 꿀단지에 빠진 파리처럼 허우적거리는 기분이 느껴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눈앞에서 버티는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문은 열리지를 않았다.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된 아파트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은 건물 위치였지 현관문이 아니었다. 현재 브랫을 가로막는 문은 발길질 두 번이면 부술 수 있는 나무문이었다. 그런데도 브랫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저주를 퍼부을지언정 부술 생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문 반대편에서 문을 열려는 사람 역시 시간의 함정에 빠져 성질을 부리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저 사람은 브랫보다 사정이 더 안 좋을 수도 있었다. 조급함에 마음이 몰려 자꾸 헛손질을 했으니까. 


 도어체인의 고리가 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걸려서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쿵 소리와 함께 문이 흔들리고 욕설이 들렸다. 욕을 하는지 UN에서 연설을 하는지 모를 정확한 발음으로 욕하며 문을 발로 걷어차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브랫은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문 너머에서 안달하는 그 조급함이 브랫의 마음에 따뜻하게 스며들어 영원히 얼어붙어 있을 것 같던 어떤 마음을 감싸주었다. 당신도 내가 보고 싶었구나. 당신도 나를 그리워했구나. 당신은 날 기다렸구나. 얼어붙은 마음에 돋쳤던 날카로운 가시가 녹아내렸다. 


욕 소리와 쇠가 쇠에 걸리는 소리가 두어 번 더 들린 후 마침내 도어체인 고리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네이트의 얼굴을 본 브랫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라크에서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속의 사내는 살이 내리고 눈빛이 형형해졌다. 사내의 눈 속에서 마치 광기처럼 번들거리던 절박한 굶주림이 네이트의 눈에도 있었다. 춥고, 외롭고, 분노로 가득 찬 밤마다 브랫은 미치지 않기 위해 네이트를 떠올렸었다. 뜨거운 몸과 헐떡이던 숨소리,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와 쾌락에 젖어 흐느끼던 신음, 그리고 그 무엇보다 네이트가 브랫을 기다린다는 사실에 매달려, 날뛰고 포악해지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네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브랫은 허기로 가득 찬 아름다운 눈을 본 순간 깨달았다. 시린 마음을 둘러싼 따뜻한 온기가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로 바뀌었다. 


두어 번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숨을 몰아쉰 네이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환희로 빛나는 그 눈을 보자 브랫은 울 것 같은 기분과 동시에 심장 위에서 붉은 불꽃이 널름거리는 것 같았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깨물어 감정을 삼킨 브랫은 더플백을 멘 어깨를 으쓱거렸다. 


“Surprize-”


빠르게 깜박이는 녹색 눈을 보며 브랫은 짓궂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목에 빨간 리본이라도 달고 올 걸 그랬습니다.”


억센 손길이 멱살을 잡아당겼다. 뜨거운 입술이 맞닿고 브랫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