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다투은 당신들 다툼보다 품위 있다 (3/4)
랑야방. 린신. 임수. 린각주
“그런데 네가 웬 일이냐? 저 아이를 다 구해오고. 평소 조정과 엮인 일이라면 그리 질색을 하지 않았더냐.”
그 목소리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기특함이나 대견함 같은. 그래서 임수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속이 비죽거리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예전 임수도 저런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칭찬을 들은 적이 있었다. 왕실 봄사냥 때 모친인 진양장공주에게서.
평소 사촌 동생들을 돌보지 않고 따돌리거나 떼놓고 달아나 항상 꾸중을 들었던 임수가 그날따라 경예와 예진의 손을 잡고 먼저 나섰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진양장공주는 드디어 저 망나니가 철이 드는 모양이라고 흐뭇하게 웃으며 리양장공주와 임수를 칭찬했었다. 그 꿍꿍이도 모르고. 그날 임수는 두 동생을 의젓하게 돌보지 않았다. 서둘러 두 아이를 챙긴 이유는 손꼽아 기다렸던 사냥인데 꼬맹이들이 귀찮게 굴까봐 아예 나무에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도둑놈 심보는 도둑놈이 가장 잘 안다고, 린신이 칭찬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동종 죄목의 전과자이자 피해자인 임수가 가장 잘 알았다. 그리고 구했다니. 그 짓거리에 어찌 그리 숭고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정황상 린신이 임수를 구했다, 구하지 않았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구했다’ 표지판을 들 수밖에 없었지만, 린신이 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엔 겪어야 했던 인권유린이 너무나 비정했고, 내몰려야했던 노동력 착취 또한 지독하게 가혹했다. 서러워 눈물로 적시던 나날들을 생각하며 입술을 실룩거리고 코를 실룩거리는데 린신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저라고 뭐 데려오고 싶어서 데려온 줄 아십니까?”
왜 난 운이 없어도 이렇게 지독하게 없어서 저런 미친 놈이 내 은인일까 한탄하던 임수는 그 말에 분노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린신의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로. 야, 이 망할 자식아!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내 입장이 뭐가 되냐!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임수는 왜 화를 낼까? 은인이라고 인정하기 싫은 자가 자기가 베푼 은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얼씨구절씨구 춤까진 추지 않더라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반발할까? 이유는 간단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황제를 제위에 올린 공신을 아버지로 두고, 황제의 누이를 어머니로 둬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임수는 매령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린신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수모를 겪어야 했다. 장터에 몰려든 인파 앞에서 린신이 손뼉을 세 번 치라면 세 번을 치고, 네 번을 치라면 네 번을 쳤다. 그뿐인가? 제자리에서 다섯 번을 맴돌고 짖기도 해야했다. 그것까진 견딜 수 있었다. 린신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친 놈이라고 생각하고, 하필이면 저렇게 미친 놈이 은인이라 미친 짓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고, 자기존엄성을 어느 정도 지키는 선에서 현실과 타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비참했던 부분은 부르는 숫자대로 손뼉치고 맴돌아 짖을 때마다 감탄하고 박수까지 치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7만 적염군을 이끄는 대장군 부친 휘하에서 패배를 모르는 소년 장수로 명성을 날렸는데, 이런 내가 손뼉치고 짖는다고 감탄하다니! 자존심과 자긍심과 존엄성이 쩍쩍 갈라져 서러워서 눈물까지 핑 돌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린신은 장터에서만 내돌려서 앵벌이 짓을 시키지 않았다.
어떤 마을을 지날 때였다. 린신은 매화 가지를 잔뜩 꺾어오더니 흥얼거리며 부채꼴로 엮었다. 그리고 임수를 그 마을 최고 부잣집에서 열린 잔치에 끌고갔다. 그날 임수는 매화 가지로 만든 꼬리를 엉덩이에 붙이고 공작새춤을 추어야했다. 회갑을 맞아 상석에 앉은 노파의 얼굴에서 태황태후와 닮은 점을 찾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었던지. 외증조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고 자기기만이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과도한 치욕감에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재주를 부리는 짐승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심지어 그렇게 번 돈으로 임수는 객잔의 객실에서 쉬지도 못했다. 임수의 자리는 마구간이었다. 붙임성이 좋아 자꾸 핥아대는 말들을 밀어내며 몸을 웅크리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나날이었는데! 그런데!!! 지난 날을 곱씹던 임수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노도와 같이 일어났다. 야, 이 새끼야! 네가 그렇게 나오면 꼭 내가 일방적으로 너한테 매달려서 그 수모와 치욕을 자초한 것 같잖아!
물론 현실을 냉정하게 따지면 그때 그 상황은 임수가 매달려야 할 상황이기는 했다. 왜 몸이 짐승처럼 변했는지 린신은 아는 것 같았고, 그래서 해결 방법도 알 것 같았고, 어쨌든 아는 얼굴이었고, 무엇보다 끔찍한 고통을 가라앉히려면 린신의 피가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일방적이든, 쌍방적이든 린신에게 매달리는 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임수는 상황 분석 대신 린신이 먼저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따라오라고 윽박질렀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렇게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현실을 모두 인정하기엔 심신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으니까. 린신이 무슨 요구를 하든, 하지 않든 이제 내세울 자존심도, 흥정할 패도 없다는 현실을 지금 상태에서 인정해버리면 바로 무너져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선택권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휘두른 린신에게 어쩐 면에선 감사했-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냐. 의식의 흐름에 생각을 맡겼던 임수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 무슨. 저 놈은 똑바로 가는 감사든, 돌아가는 감사든, 그 어떤 감사도 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다.
굴욕적인 공작새춤을 췄던 그날, 임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털에 달라붙은 매화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과연 저 새끼여야만 할까? 만약 저 새끼가 정말 날 고칠 방법을 안다면 이 드넓은 하늘 아래 그 방법을 아는 다른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까? 저 새끼 피가 없다면
발작을 누를 수 없지만 이런 치욕을 계속 당하느니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낫지, 암. 그래서 기회를 봐서 도망가자고 결심했는데, 그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린신이 엄포를 놓았다.
-털이 가려주는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 것도 재주네. 어디 할 테면 해봐. 난 널 쫓을 것이고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린신이 씩 웃었다.
-뭐, 죽이진 않을게.
그때 임수는 무당도 아닌데 미래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자신의 모습을. 임수는 린신이 싫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측은지심을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며 동정도 느끼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게 린신을 욕하던 임수는 자기가 떠올린 생각에 질겁했다. 잠깐, 나 방금 측은지심이라고 했나? 동정이라고 했어? 저 새끼가 날 불쌍하다고 해주길 바란 거야? 짐승 취급을 당하다 정말 개새끼라도 된 거야? 수야, 수야, 임수야. 어찌 이리 타락했단 말이냐. 한심했다. 경멸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서러움은 없어지지 않아 더욱 화가 났다. 그래서 가슴을 탕탕 쳤고, 그때 임수는 사람이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감정적으로 북받치면 피를 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순간을 떠올린 임수는 새삼스러운 적개심을 불태웠다. 그때, 가슴을 치며 피를 토할 때 저 미친 새끼가 어떻게 했던가? 이건 동정을 바란다, 아니다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명색이 의원이면 안정시키려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저 새끼는 그때 그러지 않았다. 미안해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얄밉게 부채를-한겨울에 웬 부채인가 싶었는데 자기표현의 완성이라고 했다-살랑이며 얼마나 자기 멋대로 구는 세상에서 살아왔으면 겨우 이 정도 수틀린다고 피를 토하냐고 빈정거리다가 이 기회에 다른 세상도 좀 겪어보라고 타박했다. 그뿐인가? 하긴 이제 원래 알던 세상이 무너지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라고 속을 긁었다. 어찌나 깐죽깐죽 사람속을 뒤집어 놓는지 웍옥웍옥 고함을 지르며 가슴을 치다 조금 기침하면서 피를 뱉고 말 걸 아주 가슴을 쥐어짜내며 피를 토해야 했다. 게다가 저 새끼는 사람 성질을 긁어 피를 토하게 하는데 재미를 붙였는지 오는 내내 시비를 걸었고, 그때마다 웍옥웍옥 가슴을 치며 시뻘건 피를 토했었다. 그런 새끼인데! 미쳐도 완전히 미친 새끼인데! 감사는 무슨 감사! 원한과 분노가 산봉우리에서 굴린 눈처럼 덩치를 키웠다.
“표본이 저거 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절벽 위에 화한독에 중독된 또 다른 표본 흔적이 있었지만 이미 현장에서 벗어난데다, 날씨가 험해서 그냥 확보한 거 주워온 겁니다.”
적염군에 생존자가 있다는 말인가? 생각지도 않은 희망적인 소식에 고개를 번쩍 들었던 임수는 린신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벌컥 성을 냈다. 표본? 주워와? 야, 이 새끼야! 내가 물건이냐!!! 잠깐, 그럼 너 그때 그 말이 이 뜻이었어? 임수는 매령에서 린신이 데리고 갈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확실한 실재를 두고 불확실한 가능성을 쫓을 수 없다던 말도 떠올렸다. 그땐 상황도 상황이었고, 무슨 뜻인지 몰라 그냥 넘어갔는데 지금 듣고 나니- 야, 그럼 너 절벽 위에 그 생존자 그대로 있었으면 그 사람 데려오고 난 그냥 두고 왔겠다? 와, 내가 저런 새끼를 그래도 은인 대접을 해야 하나? 내가 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피를 토할 때마다 너 내 등을 주먹으로 후려치거나 발로 차서 아주 피를 쏟아지게 만들었지? 그거 엄연한 살인미수 아니냐? 은원을 따지자면 네가 날 여기까지 데려온 거, 날 구경거리로 돌려서 앵벌이짓한 거랑, 피를 토할 때마다 눈앞이 노래질 정도로 과다출혈로 만든 거 합치면 그 은혜 땡치고도 남는다?
“그리고 저 새끼가 아주 배은망덕한 새끼입니다. 내공을 주입해 돌리고, 감정을 격하게 만들어서 중독된 피를 토하게 만들어 여기까지 목숨을 붙여줬는데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한 줄 아십니까? 일부러 제 옷에다 대고 피를 토했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공작을 수놓은 바로 그 옷에요!”
…괴롭히는 게 아니라 치료였나? 그럼 진작 그렇다고 말하지. 임수는 조금 머쓱해졌다. 그러면서도 미리 말해주지 않고 괴롭히기만한 린신탓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그 옷이 보이지 않더라니. 참으로 유쾌한 일이구나. 네가 그 옷을 붙잡고 수를 놓던 그 꼬라지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제 마음에 들게 공작새를 수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럼 어쩝니까? 이것도 다 심미안이 지나치게 뛰어난 인재의 숙명이죠.”
“그러고보니 장대인이 딸 시집 보내는데 혼례복에 수를 놓아줄 수 없냐고 넌지시 부탁하더구나. 자수로 명성이 뛰어난 아들을 둬 내가 아주 기쁘구나.”
“제 옷에 수 놓기만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제가 어디 자수만 잘 놓습니까? 두루두루 잘났습니다. 아무튼 저 새끼, 제가 두 달 동안 매달려 완성한 공작새를 망친 새끼입니다. 그런데도 친절함을 발휘해 매일 겹치지 않고 참신한 주제로 속을 긁는게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거짓말. 임수는 빈정거릴 때마다 지나치게 반짝거리며 진정성이 넘치던 눈을 떠올렸다.
“아들아.”
“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려무나.”
“아, 역시 너무 티났습니까? 아버님도 어디 귀족이랑 다녀보십쇼. 멍청하고 답답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냥 벼랑 위에 있던 표본을 추적해야 했다고 후회했습니다.”
임수는 맹세했다. 언젠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저 새끼에게 크고 치명적인 엿을 먹이겠다고. 뼈를 깍고 살을 녹이는 고통을 겪는다해도 반드시 저 새끼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엿을 먹이고야 말겠다고 하늘에 맹세하고 자존심에 맹세했다.
“그래도 아들아.”
“네, 아버님.”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양나라 최고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를 구했다는 사실을 바꿀 순 없구나.”
“아 쫌! 표본이라니까요! 그리고 쟨 임가의 자식이 아닙니다. 아버님의 친구 매대인의 아들이라고요.”
“변명은 비겁하단다.”
임수는 그 음성에서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아니 애초에 숨길 의도가 없어 보였다.
“흐음. 그렇단 말이죠. 뭐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린신과 보낸 날이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임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저 새끼는 저렇게 순순히 물러설 새끼가 아니다. 더 강한 주먹을 날리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 몸을 숙이면 숙였지 저렇게 고분고분한 새끼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소자는 아버님의 발끝에도 감히 미치지 못하죠. 소자야 쫄딱 망한 찌그레기를 주웠지만, 아버님께선 살아있는 권력과 교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황제도 눈치를 보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 임섭 대장군과 친분을 나누셨으니, 빌붙어 콩고물을 핥아먹을 권력의 수지타산을 따지자면 당연히 아버님께서 최고시죠. 훌륭하십니다. 탁월하십니다. 부럽습니다.”
임수는 생각했다. 저 태도가 정말 부러워하는 태도라면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는 개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금빛일 거라고.
“지금 누구더러 조정의 개와 친분을 나누었다고 망발을 하는 게냐! 매석남 그 자가 자기 신분을 속이고 접근했다!”
“아버님.”
“왜!”
“변명은 비겁하십니다.”
“이놈이!”
“그리고 생각해 보십쇼.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랑야각의 각주가 상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친분을 나눴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때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소리였다. 임수는 잠시 아련한 그리움에 젖었다. 아버님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실 때 저런 소리가 나곤 했었지.
“아, 왜 때려요! 이 장식 고정하는 거 얼마나 힘든데! 말에 밀려 주먹을 쓰시다니, 아버님의 시대도 끝이 보이는군요. 이 참에 제가 랑야각을 계승하는게 어떻습니까?”
“네가 겸손-“
버럭 소리를 지르던 린 각주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길게 한숨 쉬었다. 어떤 불가능에 대한 회한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개가 똥을 끊지. 네가 겸손해지겠느냐. 더 바라지도 않는다. 네놈한테 속을 긁힌 자가 앙심을 품고 랑야각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을 정도만 좀 겸손한 척이라도 하면 내가 소원이 없겠다.”
“아, 그래서 말인데요. 아예 기록저장소를 지하에 만들면 어떨까요? 화재에 대비할 수 있게 설계도도 만들었습니다.”
불바다가 된다는 가정 자체는 부정하지도 않는 거냐? 임수는 기가 막혔다. 천방지축 안하무인이었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는데, 저런 린신을 보니 적어도 과거의 행적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임수는 자기가 참 나은 인간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한번 뒤통수와 손바닥이 조우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고 린신이 툴툴거렸다.
“그런데 매대인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아무리 이미 황제가 저울의 추를 기울인 상태라지만, 아버님이 경고하신대로 몸을 낮추고 황제에게 충성을 증명하고 모함이 있을 때마다 바로 해명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황제를 두려워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을까요?”
“소인배 같은 처사라고 생각했겠지. 황제를 믿었을 테고.”
린신이 코웃음을 쳤다.
“자길 황위에 올릴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며 황제가 무슨 의심을 할지 몰랐다면 멍청한 거고, 알면서도 황제가 자기 우정과 충성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굳이 증명하지 않았다면 오만한 거죠. 매대인은 기본적인 정치 감각도 없이 정당성이 없는 자를 황제로 만든 겁니까? 그러니 황제의 의심이 확신까지 가는 건 진실이 아니라 구실이라는 것도 몰랐겠죠.”
“타인으로서 밖에서 보이는 인과와 당사자가 되어 안에서 부딪치는 진실은 다른 법이다. 믿고 싶은 바람이 현실에서 눈을 가리게 마련 아니더냐. 그게 마음이고. 마음이 어디 뜻대로 되더냐?”
“밖에서 보든 안에서 부딪치든 결과는 결과이고,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입니다.”
린 각주가 혀를 찼다.
“언젠가 네 오만이 네 발목을 잡을 게다.”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니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입니다, 아버님.”
린신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봤자 다 들렸지만.
“쟤 기억을 지우는 게 어떨까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에 혼란스러웠던 임수는 그 말에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