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우리의 다툼은 당신들 다툼보다 품위있다 (4/4)

소심늘보 2016. 2. 14. 20:49


랑야방. 린신. 린 각주. 임수.



“미쳤느냐?”


임수는 린 각주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리고 저 미친 놈이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할까 불안해 귀를 쫑긋 세웠다

.

“아니, 들어보시라니까요. 평소라면 기억을 지우는 시술이 워낙 통증이 심해서 몰래 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쟨 화한독을 제거할 거 아닙니까? 칼로 생살을 베어내는데 거기에 꼬챙이로 좀 찌른다고 알기나 하겠어요? 절대로 눈치못채게 해치울 수 있다니까요?”


“시술을 몰래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왜 그러려는지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


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심각성을 따지자면 전자가 훨씬 위중하지만, 당장 궁금한 건 후자였다. 하지만 린신은 지금껏 그랬듯 임수가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았다.


“하! 시치미 쩌시네요. 남들이 보면 평생 군자의 도리를 지키는 바람에 정도에서 벗어난 길은 아예 모르는 줄 알겠습니다? 과연 사정과 해결법을 다 아는 주제에 딴청을 피워 의뢰인 애를 태워 정보를 흥정하는 랑야각 각주답습니다. 소자는 순수해서 그런지 도저히 아버님처럼 낯짝이 두껍진, 아야!”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대신,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다 얻어맞았다.


“아 쫌! 자꾸 때리지 마요. 이 머리 장식 고정하기 힘들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임수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포인트가 그거냐? 머리를 때려서 기분이 나쁘다도 아니고, 바보되면 어쩌냐도 아니고, 머리장식이 비뚤어지는 게 문제라는 거냐? 이해할 수 없었다. 임수는 도저히 린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강호인과 비강호인, 아니, 그냥 비강호인 정도가 아니라 귀족이기 때문에, 소속 집단이 달라 필연적으로 가치관에도 차이가 있다는 문제가 아니라고 임수는 확신했다. 미친 놈에도 급이 있다면 저 새낀 어느 정도일까 가늠하는 임수의 귀에 린 각주의 노성이 들렸다.


“그러면 자기 과오를 묻자고 남의 기억을 없애자는 정신나간 놈 뒤통수를 때리지 쓰다듬으랴?”


과오? 임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소리지? 아, 혹시 그 동안 저 새끼가 벌였던 착취와 학대 말하나? 하긴 어디 가서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짓이긴 했지.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임수는 이내 어떤 생각을 떠올렸고, 울컥 의분이 치밀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잠깐, 그럼 창피한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다는 소리 아냐! 잠깐, 혹시 저 새끼 이렇게 기억을 지울 거 믿고 그런 짓을 저지른 거였어? 와, 미친 새끼. 존나 미친 새끼! 새삼스럽게 억울하고 서러워서 부들부들 떠는데, 린신은 그 예상의 그물에도 잡혀주지 않았다.

왜요? 모두에게 이로운 방법이잖습니까. 쟨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나 새 인생 새롭게, 편하게 살아서 좋고, 세상엔 혹시 모를 편지풍파가 일어나지 않아서 좋고, 소자와 아버님은-”


“세도가와 교류했다는 증인을 묻어서 좋고?”


린신이 경박하게 낄낄거렸다.


“거봐, 이것 보라지. 역시 다 아셨으면서 뭘 또 모르는 척 새침을 떠셨, 악!”


“좋기는!”


“아악!”


“뭐가!”


“아아악!”


“좋다는게냐!”


“아 쫌!”


“미친 놈.”


린신의 저의에 경각하고, 또 한편으론 연이어 들리는 낯익은 타격음에 아련한 향수에 젖었던 임수는 다시 한번 린 각주의 의견에 동의했다. 전적으로 동의했고, 격렬하게 동의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저 새끼는 아주 미친 놈이다. 미쳐도 완벽하게 독보적으로 미친 놈이다. 아무리 강호인은 조정과 엮이기 싫어한다지만 그걸 어떻게 사람 기억까지 지우고 매립할 흑역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 미친 거 아냐? 아니, 미친 놈 맞았지. 그런데 저렇게 미친 놈을 자유롭게 풀어놓아도 되는 걸까? 세상이 평화롭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혼돈의 아수라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격리해서 가둬야-


“흥! 되게 군자인 척 시치미를 떼시는데요, 다 알거든요? 솔깃해서 혹하셨던 거 다 보였습니다.”


뒤통수를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들려야 하는데. 호통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야 안심할 텐데. 불안한 침묵만 이어졌다. 린신이 좀 유별나서 그렇지 강호의 상식으로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임수는 밀려드는 두려움에 마른침을 삼켰다. 달아나야 하나? 어디로? 달아나면 그 뒤는? 이 꼴로 뭘 할수 있지? 복수는커녕, 생존도 힘들 텐데. 강호인이 조정을 싫어하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예전 아버지 임섭과 강호를 유람할 때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고 가명을 썼으니까. 단지 임수가 몰랐던 건 그 사실이 이렇게 발목을 잡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매장소라는 이름은 더 자유롭게 해주는 가면 놀이 같아서 신나면 신났지, 본인의 진짜 신분을 남들이 어떻게 보든 사실 임수는 신경쓰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든 무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임수는 부친과 적염군 형제에게 가호를 빌며 린 각주의 말을 기다렸다.


“행동을 하고 어찌 결과를 피하겠느냐? 인과율은 아무도 벗어나지 못한다. 충분히 보지 않았느냐.”


멋쩍은 헛기침소리 뒤에 들린 그 말에 임수는 안도했다. 그리고 바뀐 처지를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황제의 누이인 장공주를 어머니로 두고, 7만 적염군을 거느린 대장군을 아버지로 둔, 불패의 소년장수라는 위치에서 이렇게 타인의 도덕성과 호의에 일방적으로 운명이 갈리는 처지가 될 줄이야. 긍지와 활기가 재가 되어 흩어져 침울하던 임수는 린 각주의 말에 다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나저나 매령엔 왜 간 게냐?”


그러고보니 궁금했다. 그 동안 린신은 온갖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고, 구박하고 착취하면서 한번도 왜 매령에 갔는지를 말한 적이 없었다. 혹시 무슨 비밀스러운 목적이 있었던 걸가? 남에게 말하기 민망한 은밀한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금 들어두면 나중에 저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는 미친 놈의 약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당연히 설개충을 채집하러 갔죠.”


…임수는 생각했다. 저 새끼는 은밀이나 비밀이라는 개념을 알기나 할까?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하고 자신감이 넘쳐서 뭘 할 때마다 세상에 대고 자랑하지 않는 게 기특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도 잘난 척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진 않는데, 저 새끼는 미친 것뿐만이 아니라 잘난 척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이구나. 그리고 나는 적어도 생색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체면치레라도 하는데 저 새끼는… 임수는 새삼스럽게 앞날이 암담했다.


“그놈의 「백발성성 탈모발광」 계획인지 뭔지를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게냐?”


“기억력 감퇴는 치매의 전조증상이라는데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아버님. 「백색공자 백발완성」 계획입니다. 그리고 포기라뇨. 그런 패배주의적 선택을 하기엔 이 린신, 지나치게 뛰어난 천하의 재인 아니겠습니까?”


한숨소리가 들렸다. 너를 바보라고 생각한다는 속내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대놓고 드러내 속을 박박 긁겠다는 의도가 뚜렷한 한숨소리였다.


“그래, 기어코 염료통에 대가리를 처박더니, 뱅글뱅글 돌 때마다 희끄무죽죽한 머리털이 씀텅씀텅 빠지는 꼴이 가히 장관이었지. 구경꾼에게 큰 웃음을 주는 재주가 남다르기는 했다.”


…그랬구나. 임수는 귀를 간신히 넘기는 지금 린신의 머리카락 길이를 이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저 새끼가 하늘이 무너지지 않고서야 머리카락을 저렇게 짧게 자를 리가 없지. 처음 만났을 때 저놈의 머리꼬라지 때문에 개싸움을 했는데, 그래, 저 새끼가 머리카락을 자를 리가.


예전 임섭과 함께 랑야각에 처음 왔을 때, 임수는 거대하고 치명적인 컬쳐쇼크를 받았었다. 아니, 문화충격 정도가 아니었다. 그건 문명충돌이었다. 가명을 쓰면서 강호를 유람하는 건 재미있었다. 아부를 하는 관리가 귀찮게 굴지 않아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나, 하다못해 아버지가 정고모를 구했던 것 같은 모험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분야의 순위를 매기는 랑야방을 작성하는 랑야각에 간다고 했을 때, 임수는 신났었다. 각주의 아들 린신이 자기 또래라는 말을 듣고 더욱 신났다. 강호인은 괴팍해 조정에 관여하지 않는다지만, 둘은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우정이 깊어져 린신은 강호를 버리고 임수의 책사가 되고, 함께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워 임수를 양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웅으로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기대에 잔뜩 부풀어 랑야산을 올랐던 임수는 린신의 머리카락을 대면하고 얼어붙었다.


보기드물 정도로 찰랑찰랑하고 눈을 믿기 힘들 정도로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머리카락이었다. 예황보다, 아니, 황궁 연회에서 춤을 췄던 무희들 중에서도 보지 못했던 머릿결이었다. 비현실적으로 결고운 머리카락에 1차 충격을 받은 임수는 2차 충격의 급류에 휘말려야 했다.


뭐하는 짓이지, 저거? 존나 빙글빙글 도는데 왜 저러는 거야? 검을 들기는 했으니 일단 검술 연습 같은데… 저거 진짜 검술인가? 강호인 검법은 저러나? 왜 저렇게 끊임없이 계속 도는데? 그냥 찌르면 되잖아? 힘을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회전력을 더하는 것도 아니고,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냥 찌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저렇게 공중회전까지 하지? 저거 진짜 무슨 효력이 있는 거야? 잠깐 저 새끼 지금 옷자락 휘날리는 거 신경쓰는 거 맞지? 검을 찌르는 동작에 실리는 힘이나 각도에 신경쓰는 게 아니라 옷자락에 신경쓴 거 맞지? 지금 세 번째 다시 도는데, 온 신경이 옷자락이 얼마나 높게 휘날리는데 쏠려있어. 와, 저 새끼 뭐냐? 그리고 옷자락 이야기 나온 김에 말하는데 왜 저렇게 겹쳐입지? 춥나? 그럼 옷을 두껍게 입지, 왜 저렇게 하늘거리는 옷을 입는 건데? …음, 지금 존나 싫은 생각 떠올랐어. 저 새끼 저거 더 펄럭거리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냐? 맞네. 그러니까 소맷자락도 바짓자락도 묶지 않고 저렇게 거추장스럽게 펄럭이게 그냥 두지. 그런데 저렇게 치렁치렁 펄럭펄럭거리는데 한번도 옷자락이 검에 걸리지 않네. 진짜 신기하-잠깐, 뭐야, 지금 뭐야. 마무리로 돌면서 옷자락 펄럭이다 가라앉는 거랑 머리카락 휘날리다 가라앉는 거 시간차 신경쓰는 거야? 그래서 저렇게 열 번 내리 돌면서 확인하는 거야? 와, 존나.


원래부터가 꼬투리 잡힐 여지 없이 돌려서 두리뭉실 매끈하고 세련되게 외교화술을 구사하는 능력도 없었는데 생전 처음 겪은 충격적인 경험 앞에서 10대 소년의 주둥이는 꾸미지 않은 속내를 거침없이 내뱉고야 말았다. 기녀도 너처럼 계집애스럽진 못할 거라고. 필연적으로 둘은 싸웠고, 그 싸움은 나이에 어울리는 개싸움이었다. 하지만 임수는 그 와중에서도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회전에 신경쓰는 린신의 태도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주먹질을 하는데 공중회전을 해서 타격력을 떨어뜨렸지만 동시에 발길질로 약화된 펀치력 이상으로 타격을 주는 치밀하게 미친 짓에 전의가 꺾였고, 싸움이 끝난 후, 흙 때문에 머리카락이 상했다며 온갖 약초를 개어 머리카락에 치덕치덕 바르고 천으로 머리를 둘둘 말아 물을 가득 담은 대야를 불에 올려 김을 쐬는 모습에 완전히 압도 당하고 말았다. 랑야산을 오르며 기대했던 모험은 없었다. 강호의 소년과 귀족 소년이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기는 커녕,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구조를 지닌 미친 놈한테 정신이 탈탈 털리기만 했으니까. 뭐 따지자면 모험은 모험이기는 했다. 신나고 통쾌한 활극이 아니라 부조리 앞에서 주인공이 무너지는 비극이어서 그렇지. 아무튼 그때 만약 자기 머리카락을 건드렸다고 세상을 멸망시키는 미친 괴물이 있다면 저 새끼일 거라고 폭언을 퍼부었던 임수로선 매령에서 린신의 짧은 머리를 봤을 때부터 쭉 궁금했던 의문은 풀었지만, 동시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미치면 멀쩡한 머리를 백발로 만들겠다고 염료통에 머리를 박을 수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끔찍할 것 같았다.


“남의 아픈 시행 착오를 꼭 그렇게 찌르셔야겠습니까?”


“그러면 점잖 빼느라 모처럼 온 기회를 날리랴?”


“하긴.”


임수는 눈을 끔벅였다. 납득하는 거야? 그냥 그렇게 납득하고 마는 거야? 이해할 수 없었다. 임수는 린 부자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머리는 왜 다시 기르는 게냐? 계속 민둥머리로 지내면서 하얀 비단실로 만든 가발을 계속 쓰지.”


그러자 린신이 한숨을 쉬었다. 진정한 아쉬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소자도 아쉽습니다. 비단실 가발은 색상도 마음에 들고, 결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스타일을 전후좌우 사방에서 체크하면서 살린 다음 쓸 수 있어서 좋았는데 회전하면 자꾸 벗겨지지 뭡니까? 그래서 접착제로 붙여봤는데 땀 차면 냄새가 고약해져 여름에 낭패일 것 같고, 게다가 접착제를 아무리 순하게 만들어도 두피에 뾰루지가 나더라고요.”


린신은 다시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임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무슨 말인지 알았다. 단지 안다고 수긍하면 따라올 상상속의 어떤 장면이 두려워 알지 못한다고 부정하고 싶은 거였다. 예를 들면 대머리 린신이 머리 모형에 씌운 가발을 빗질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땋고, 풀고, 묶어서 올리고, 다시 내리고, 그 짓을 몇 시진을 하다 머리 모양을 결정하고, 그 뒤엔 다시 이 장신구를 댔다 저 장신구를 댔다 그 짓을 또 저지른 다음 가발을 쓰고 거울 앞에서 하얀 옷자락을 나부끼며 한 바퀴 뱅그르르 도는, 임수는 혀를 깨물었다. 제길, 결국 상상해버리고 말았어. 눈을 찌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 임수는 근본적인 모순을 깨닫고 고민에 잠겼다. 만약 지금 눈을 찌른다고 해도, 실제로 목격한 장면이 아닌 상상이라 눈만 아프고 소름끼치는 상상은 그대로일 것 아닌가. 임수는 곤란했다. 난감했다. 상상속을 비집고 들어가 그 안의 자기 눈을 찌르는 방법은 없을까?
“머릿가죽을 벗겨내지 않는 한 뗄 수 없는 초강력 접착제를 만들어주랴?”


임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린 각주 목소리가 좀 이상했다. 물론 지금까지 두 사람이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은 건 아니지만 저 음색은 묘하게 공격적이었다.


“어째 어투에서 가시가 느껴집니다?”


린 각주는 허어-하고 들려주기 위한 한숨을 쉬었다.


“네놈이 흰색에 미쳐서 질 좋은 흰색 옷감을 싹 쓸어오는 건 그렇다고 치자. 흰색을 돋보이게 만드는 연푸른색 물을 들여달라고 염색방에서 진상을 부리는 것도 넘어갈 수 있다. 욕먹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염료통에 대가리를 박아 머리털이 빠진 것도 상관없다. 네가 대머리 되지 내가 대머리되냐? 네놈 미친 짓에 너만 바보되고 끝나면 네가 하얀 공작새를 숭배하든, 대머리독수리를 카피하든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 네 멋대로 하게 둘 수 있었다. 그랬었다.”


린 각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네놈이 멀쩡한 비둘기들을 백색종으로 죄다 바꿔놓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기분 탓인지 산새들도 놀라 푸드득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경쾌한 타작 소리가 뒤를 이었다.


“우리 비둘기들이!”


“악!”


“애완조인지 아느냐! 전서구다. 전서구라고 이놈아!”


“아악!”


“이 할이다! 네놈이 비둘기들을 바꾼 후 회수율이 이 할이라고 이놈아!!”


“아프다고요!”


“아프라고 때리지 간지러우라고 때리냐? 전서구 최우선 고려사항이 무엇이더냐? 안전회수율 아니냐! 백색종은 촌락에서도, 성에서도 숲에서도 얼마나 눈에 띄는지 모르느냐! 보호색으로 주변에 섞여도 모자랄 판에 흰색으로 존재를 강조하면 어쩌겠다는게냐! 왜, 아예 번쩍번쩍 은패를 만들어 목에 채우지 그러냐? 「저는 전서구입니다. 정보를 운반중이죠」 이렇게 새겨서 말이다!”


“아 쫌! 그래서 암호도 싹 바꾸고 교체 주기도 당기지 않았습니까? 정보 유출은 없을 거라고요.”


“유출이고, 누락이고 자시고 할 정보 자체가 오지 않는다고! 중간에 사람에게 잡히고, 매에 잡하고, 독수리에게 잡히고, 고양이에게 잡혀서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에 제가 독비둘기로 한번 개량을 해볼까 하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듣기만한 임수가 몸을 움찔거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정도였다. 린신을 좋아하진 않지만 두개골의 안녕을 순간적으로 걱정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나이 들면 싫어도 하얀 머리가 되는데 왜 벌써부터 난리냐.”


린 각주의 지친 음성을 린신의 발끈한 목소리가 이었다.


“늙어서 센머리랑 높은 심미안이 고르고 고른 백발을 같은 취급하지 마십시오! 게다가 쭈글쭈글한 얼굴에 하얀 머리랑 탱탱한 얼굴에 하얀 머리가 주는 임팩트가 같습니까? 전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을 이룩하고 싶습니다!”


“내 얼굴이 쭈글쭈글하다는게냐!”


임수는 이제 저 부자의 주거니 받거니 장단이 슬슬 피곤해졌다. 그래도 예의상 일단 궁금해하기로 했다. 왜 요점이 거기로 튀는 걸까?


“굳이 그 부분만 콕 집어서 화내시는 모습을 보니… 뭐, 굳이 소자가 말씀을 드리진 않겠지만, 아버님 방에 수두룩한 주름완화연고가 아버님께서 스스로의 노화를 바라보시는 시선을 웅변한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신구로 땜빵을 가린 주제에 주둥이는 매끄럽게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단점에서 시선을 분산시키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치장의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꾸 소자의 시행착오 꼬투리를 잡으시는데, 작년에 구기자랑 구기자 성분을 강화하는 약초를 갈아 발효한 염소젖으로 개어 얼굴에 바르고, 반 시진 뒤에 씻는 걸 잊고 다음날까지 그대로 주무신 분은 꼭 아버님이 아니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원숭이 궁둥짝 꼴이 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입니다.”
어색한 헛기침이 들렸다.


“노화를 지연코자하는 바람은 인지상정이 아니더냐. 그에 비해 넌 원형을 파괴하려는 것이고.”


“자연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버님이나 소자나 오십 보 백 보입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깐죽깐죽 주둥이는 천하제일이구나. 자기 식구 감투 씌우기라는 잡음이 나올까봐 랑야방을 작성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청출어람을 목표로 정진중이지만 아직 멀었죠.”

“어쩌다 이런 뺀질이가 나왔을꼬.”


“그러면 아버님이 본보기인 환경에서 샌님 자식을 바라신 겁니까? 그건 좀 양심없는 기대 아닙니까?”


“그래, 너 잘났다. 그건 그렇고 건조소 부지에서 왜 자꾸 검 연습을 하는 거냐? 볕이 잘 들고 바람 길이 좋아 약재를 말리기에 적합하다는 소리를 했더니, 다음날부터 바위를 깎아 넓고 평평하게 다듬길래 웬일로 기특한 짓을 하나 싶었는데, 건조소를 세우려고 일꾼들이 오면 쫓아냈다며? 어찌나 지독하게 행패를 부리며 쫓아냈는지 네가 없는 사이에 건조소를 지으려고 했는데 모두 손사레를 치며 진저리를 쳤다.”


“말씀대로 볕이 좋아 멀리서도 소자의 검무가 잘 보이고, 바람 길이 시원하게 뚫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한층 더 각별하게 나부끼니까요. 거기서 검무를 추고나면 상쾌함이 남다릅니다. 제가 깎아 다듬었으니 그곳은 소자의 것입니다.”


“너랑 대화가 길어질 수록 늙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나. 그런데, 나부낀다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이다, 장씨 대장간에 가서 깽판 좀 부리지 말거라. 돌릴 때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낭창 흔들리고, 물고기 비늘처럼 얇고, 천을 살짝 덮으면 베일 정도로 예리하면서, 무거운 강철검과 부딪쳐도 상하지 않는 검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며? 검신은 무슨 수를 써도 백색으로 뽑고 공작새를 음각으로 새기라고 했다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억지라뇨! 장씨는 천하제일 검 장인 랑야방 순위 1위가 아닙니까? 그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죠. 그리고 깽판이라는 말씀은 억울합니다. 정당한 의뢰비를 지불했고, 웃돈까지 넉넉하게 얹었단 말입니다.”


“그 의뢰비와 웃돈에 뇌물까지 얹어서 장씨가 날 찾아와 하소연했다. 흰색 끄트머리만 봐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리니 제발 너 좀 막아달라고. 그러면서 혹시 랑야방에 이름이 오르면 상납금을 바쳐야하는데 자기가 그걸 몰라 이렇게 돌려 괴롭히는 거라면 앞으론 꼬박꼬박 달마다 상납금을 바칠 테니 그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괘씸하면 자기 이름을 빼도 좋다고 했느니라. 랑야각이 세워진 이래 이런 망신은 없었다!”


“쳇. 랑야방 1위 장인도 시시하네요.”


“네놈이 뱅뱅 도는 것으론 부족하냐? 꼭 그렇게 무기까지 돌려야겠다면 철퇴나 채찍으로 바꾸면 되지 않느냐.”


“철퇴는 싫습니다. 무식하게 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잖습니까. 무기의 임팩트가 너무 강합니다.”


임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기에 신경쓰기엔 린신의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예를 들면 고전 끝에 바로 찌르기만 하면 승부가 결정나는 상황에서도 마음 먹은 회전수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날리며 뱅뱅 돌고야마는 린신의 꼬라지가 너무 강렬해서 적은 린신이 칼을 휘두르든, 창으로 찌르든, 철퇴를 돌리든, 심지어 말을 번쩍 들어 빙빙 돌리다 냅다 집어던져도 찰랑거리는 린신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에 신경쓰느라 린신이 무슨 무기를 쓰는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채찍은… 솔직히 소자의 비주얼에 채찍을 쓰면 좀 변태같지 않겠습니까.”


임수는 생각했다. 와, 변태가 변태를 욕한다. 린 각주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칼 든 변태나, 채찍 든 변태나.”


“하,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아버님께서 주무시기 전 반드시 바르시던 보습 기름병을 실수로 깨뜨렸는데, 사과드리지 않을 겁니다.”


“침소 비밀금고에 잘 넣어둔 병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실수로 깰 수 있단 말이- 아니구나, 그래, 어쩐지 아까 연고를 만들 때 내가 실수로 전갈 단지랑 설개충 단지를 착각해 안에 있는 말린 설개충을 전부 썼는데 조금도 미안하지 않더구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쇼! 전갈 단지랑 설개충 단지 색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착각하신단 말입니까? 기미제거연고에 전갈보다 설개충이 효과가 좋아서 넣은 거 다 압니다! 그 설개충이 어떤 설개충인데. 소자가 실한 놈으로 한 마리 한 마리 골라서 쪄서 말리고, 쪄서 말리고, 아홉 번을 쪄서 말린 설개충이란 말입니다!”


“효과 좋겠구나, 잘 바르마.”


그리고 설전이 이어졌다. 열받은 당사자야 머리가 뜨거워 모르겠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제3자가 듣는 것만으로 부끄러워지는 유치한 말싸움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의원이어서 그런지 내용은 점점 더 적나라해졌고, 마침내 새벽 발기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 임수는 귀를 틀어막고 이불에 몸을 던져 발버둥을 치며 이불을 씹었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수치는 내 몫이란 말인가! 저 사람들은 왜 저런단 말인가! 어찌되었든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의 위치에서 아랫사람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


임수는 잠시 발버둥을 멈추고 눈을 끔벅였다. 방금 한 한탄이 낯설지 않았다. …아, 그러고보니 어머님과 경우 형님한테 항상 듣던 소리구나. 반성하려던 임수는 다시 들려오는 고성에 그래도 난 저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관계 없는 일이 주는 수치심이라는 낯선 경험에 몸을 던졌다.


임수는 문득 임섭을 떠올렸다. 아버님은 저들이 저토록 유치한 자라는 사실을 아셨을까? 모르셨겠지. 모르셨으니까 인연을 만들어 주셨겠지. 아아… 아버님, 소자는 이제 어찌합니까? 소자가 믿고 기댈 자들이 저렇게 미친 자들입니다. 임수는 임섭이 그리웠다. 임섭은 때론 엄격한 아버지였고, 임수는 마냥 순종하는 아들은 아니어서 두 부자의 고집이 부딪칠 때도 있었지만 둘은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허심탄회하게 속을 터놓는 부자였다. 그래서 임수는 세상에 저렇게 못들어줄 정도로 유치하게 싸우는 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또 싸우시는군.”


“각주와 공자가 저러시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린 각주와 린신이 싸우는 반대 방향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랑야각에서 일하는 사람들 같았다. 임수는 문득 랑야각 사람들이 불쌍해졌다. 믿고 따를 수장이 저래서야 어디 아랫사람들이 마음이 편하고, 랑야각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이 세상에 나와 뜻을 펼치는데 소속 집단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다니. 임수로선 상상하지도 못할 괴로움이었다.


“그래도 매 대인 부자 싸움보다는 낫지 않은가.”


뭐? 임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긴. 매 대인과 매 공자의 언쟁은 좀… 그랬지.”


뭐가? 좀 그렇다는 부분에 들어가는 묘한 머뭇거림이 임수는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각주와 공자가 싸우시는 이유는 좀 비상식적이긴 하지만, 납득이라도 할 수 있지.”


그럼 나와 아버지는? 임수의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하긴 매 대인과 매공자 싸움은…”


왜? 아버님과 내가 어땠길래! 흐린 말꼬리가 굉장히 신경쓰였다.


“우리가 모시는 분이 각주라서 다행이지.”


저게?


한숨은 한숨이되, 일말의 안도가 느껴지는 한숨을 남기고 두 사람은 멀어졌다. 한마디씩 주고받을 때마다 더 유치해지는 린 부자의 말싸움을 들으며 임수는 혼란에 빠졌다. 조금 전 스스로의 존재를 돌아보며 반성했는데, 아무래도 혼자 반성해서 끝날 일이 아니지 싶었다. 아무리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지만, 이렇게 까치와 까마귀가 날아왔다가 거리를 재보고 고개를 절레거리며 포기하고 돌아갈 정도일 줄이야.


마음속에 불었던 바람이 폭풍이 되었다. 아버님, 소자는, 그리고 아버님은, 우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 질문에,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대답이 밀려들어 임수는 눈을 감았다. 진실은 언제나 잔인했다. 그리고 때로는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마음속의 번개가 번쩍거리고 천둥이 우르릉쾅쾅 울리며 두려움을 모르는 불패의 소년 장수이자, 적운의 악몽이자, 적염군의 필요악이자, 금릉의 재앙이었던 소년을 혼란과 자각에 따르는 부끄러움의 소용돌이로 더욱 깊숙히 밀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