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나쁜 날
랑야방.
순풍을 받은 돛이 팽팽해졌다. 앞 배와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한 명이 노를 젓는 나룻배와 돛대가 여섯 개인 범선의 속도 차이는 확연했다. 범선은 강물을 힘차게 가르며 나아갔고, 자욱한 물안개가 밀려들어 숨을 쉴 때마다 코 안쪽으로 물기가 맺혔다. 하지만 쌍찰방 방주 계영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연신 혀로 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모르는 작자들이 본다면 이 상황은 끝난 상황이라고 생각하겠지. 옆에서 희희낙낙하는 바로 이 새끼처럼. 좋겠구나, 모르는 놈은 속이 편해서. 다시 한번 마른 입술을 축인 계영은 소리쳤다.
“서둘러라!”
초조한 속내를 드러내며 계영이 부하들을 독려하고, 계영과 같은 심정인 부하들도 더욱 속도를 냈다. 그러자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감탄했다.
“계 방주. 이제 열 걸음 정도 걸을 시간이면 저 놈들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끝까지 최선을 다 하다니 내 무척 감동 받았소. 역시 쌍찰방에게 일을 맡기길 잘했지. 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계 방주와 의논하리다.”
감동이 가득한 얼굴로 앞으로의 미래를 약속하는 사내에게 계영은 외쳤다.
닥쳐, 멍청아!
물론 속으로. 그리고 역시 이번 의뢰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경국공 백업의 친척인 이 자가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의뢰했을 때 계영은 맡기 싫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주먹이 중심이고 규모가 고만고만한 방파의 주 수입원이야 뻔했다. 공갈 협박과 납치, 그리고 살인. 쌍찰방도 그렇게 방의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계영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아이와 여자, 노인은 죽이지 않는다? 그렇게 인과 의가 중요하면 방의 운영에는 돈이 들고 쌍찰방 규모로 돈을 벌자면 손을 더럽혀야 한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을 때, 방을 해산하거나 방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초야에 묻혔겠지. 나쁜 놈은 어디까지나 나쁜 놈이니 변명은 하지 말자는 것이 계영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계영의 원칙은 정의와 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원칙은 바로 권문세가와 얽히지 말자, 특히 당쟁의 중심에 선 일족과는 말도 섞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실 토지 수탈 보조는 계영이 가장 좋아하는 의뢰였다. 사례비도 두둑했고, 무엇보다 수탈한 토지의 규모에 따라 땅부스러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영향력이 지역에 그치는 호족이 의뢰하면 계영은 발벗고 나섰다. 이제 쌍찰방이 빈주 지역에서 헛기침 좀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져 일도 수월했다. 그런데 쌍찰방에 의뢰를 한 이 백씨 집안 사내는 계영의 영업 원칙에 어긋나는 자였다. 세상 돌아가는데 관심이 있는 자라면 경국공 백업이 태자와 대항하는 예왕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가문의 일원이 현역 조정 대신이고 당쟁의 중심에 있다면 그 어떤 일을 맡아도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반대편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었으니까. 바로 이렇게.
천천산장이 빈주까지 와서 훼방을 놓을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역시 이 의뢰를 맡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계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놈의 조전홍이 문제지. 작년 생일 계영은 조전홍을 선물로 받았었다. 그리고 한번 그 술을 마시고 나니 그 아래 등급의 술은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쌍찰방 방주가 되어서 이 정도 술을 마시는 건 당연하다고 합리화를 하면서 계속 조전홍을 마셨더니 이번 겨울 재정이 좀 빠듯해졌다. 따지자면 모두 계영 본인 탓이었다. 그래서 계영은 반성했다. 그리고 의를 저버린 자답게 화살을 빠르게 남에게 돌렸다.
탁청요, 저 쥐새끼 같은 새끼! 아무리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지만 같은 강호인이 되어서, 그리고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어떻게 이리 치사하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아무리 상황이 급하고, 상대가 적이라고 해도 여기로 끌고 올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렴.
계영의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잡지 않으면! 부하들에게 강에 뛰어들어 배를 밀며 발장구를 치라고 해야할까 고민하던 계영에게 두려워하던 위기가 성큼 다가와 아가리를 쩍 벌려 계영과 쌍찰방의 배를 삼켰다. 그 사실을 깨달은 계영이 탄식했다.
“더는 못 간다.”
‘다’를 뱉고 숨을 한번 들이쉬었을까? 물결 소리와 배가 삐걱대는 소리를 누르며 피리소리가 들렸다. 아주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이. 계영은 뒷목이 쭈뼛거렸다.
“배를 멈춰라!”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는 의뢰인에게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탁청요가 배를 띄워 이곳으로 향했을 때 만약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평생 제멋대로 살아왔을 의뢰인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했는데. 입에 올리는 자체가 소름끼쳐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피리소리가 물안개 자욱한 강에 울렸다. 잘 울렸다. 매우 잘 울렸다. 대단히 쨍쨍하게 울렸다. 계영은 왜 그렇게 잘 울릴까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나 계영은 혀를 깨물 뻔했다. 안개 너머로 어른거리던 인영이 다가오며 모습이 분명해졌고 계영은 속으로 절규했다. 나타났다! 계영은 바로 배를 돌려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강호의 규칙상 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그럴 수 없었다. 진작 배를 멈출 걸. 피리소리가 멈추고 한 남자가 서있는 배가 매끄럽게 회전했다. 배 위에 선 인물과 마주보며 계영은 후회했다. 혀를 깨물어 피를 철철 흘려서 응급상황을 만들어야 했는데. 저 멀리 멀어지는 탁청요의 배를 보며 계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계산했다.
거의 다 잡은 이 상황이 아깝기는 했지만 여기서 놓친다고 해도 의뢰는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저 노부부가 금릉의 관아에 가 경국공 일족이 토지를 수탈했다고 고발하기 전에 막으면 되니까. 탁청요가 지금이야 한숨 돌리겠지만 여기 랑주에서 손발이 묶이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땅을 백씨 일족에게 빼앗긴 저 노부부를 탁청요가 의협심에서 도왔다면 강좌맹에게 도움을 청할 테고 일은 복잡해지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탁청요는 신분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복면을 했고, 지금도 숨만 죽이고 있다. 천천산장은 태자를 도와 예왕의 뒤통수를 치려는 거다. 그러니까 조정일을 하는 거였다. 대체로 강호인은 조정 사정에 끼어들기를 꺼렸다. 그러니 천천산장은 탁청요를 돕기 위해 랑주로 원군을 보내지 못한다. 다른 방파의 규칙을 이용해 정쟁의 불씨를 옮겼다고 선전할 순 없을 테니까. 이 사실이 강호에 퍼지면 아무리 강좌맹이 너그럽게 넘어가도 천천산장으로선 반드시 갚아야 할 큰 빚을 지는 셈이었고, 자고로 강호에서 빚은 함부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에서 놓쳐도 탁청요 일행이 랑주에서 벗어나는 순간 죽이면 된다. 살리는 게 어렵지 죽이는 건 쉬웠다. 길목을 지켰다가 그물을 던진 후 화살을 퍼부으면 끝이니까. 계산을 마친 계영은 서둘러 지금 당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 빨리. 잽싸게. 서둘러서.
“소인 계영, 잠시 사리분별을 못하고 강좌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계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자신과 배 위에 선 청년을 번갈아 보는 의뢰인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황당하겠지. 그래, 이해한다. 이해할 수 있다. 이 인원으로 저 비리비리한 한 명에게 쩔쩔매는 꼴이 기괴하겠지. 이해하니까 그냥 지금처럼 닥치고 있어라. 괜히 주둥아리 놀려서 일 키우지 말고. 당장 소리지르고 행패 부리지 않는 점 높이 산다. 조금만 더 침묵하는 미덕을 발휘해라. 그럼 내가 무슨 수를 쓰든 네 의뢰를 완수해준다. 배 위의 청년이 조금도 화나지 않은 척, 어디까지나 척, 그러니까 넌 지금 대단히 좆됐다는 사실을 은근히 암시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쌍찰방은 강좌맹의 이웃 아닙니까.”
계영은 신음을 삼켰다. 그 사실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저 놈은 알까? 바로 옆 지역이라 싫어도 자꾸 부딪쳐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나 말고도 우리 쌍찰방 형제 전원이 얼마나 큰 정신적 피해를 입는지 저 놈은 알까? 모르니까 저런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걸까? 계영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 놈은 무공은 못하지만 머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좋은 놈이 아니던가. 알면서 속을 긁는 거겠지. 역시 저 놈이나 린신이나 얽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놈들이다. 계영은 기존의 편견을 더욱 굳건히 했다.
“방주가 직접 오셨다는데 마중 나오는게 도리겠지요.”
와, 뻔뻔한 놈! 계영은 욕했다. 물론 속으로. 지금 한 말만 들으면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평소 강좌맹의 종주는 이런 상황에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이번엔 특별히 계영의 체면을 살려주느라 나온 거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당치도 않은 오해였다. 급한 마음에 강좌맹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못 볼 꼴을 보고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강호인이 한둘이 아닌데 어디서 거짓말을 해도 저렇게 뻔뻔한 거짓말을! 강좌맹 종주는 하루 종일 강에서 대기하다가 희생자가 걸리기만 하면 소맷자락 휘날리며 나타난다는 소문이 괜히 강호에서 도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어디서 거짓말을 해도 저렇게 되도 않는 거짓말을! 정의와는 거리가 먼 일로 쌍찰방을 키우고 현재도 정의와는 거리가 먼 의뢰를 수행 중인 쌍찰방 방주 계영은 격렬한 의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때 공중에서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인영이 보였다. 계영은 역시 아까 혀를 깨물었어야 했다고 다시 한번 후회했다. 경공을 펼치며 다가온 앳된 소년이 나룻배에 내렸다. 그런데 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저 소년의 내공이 고강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계영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만 생각이 배 밑의 비밀에 미쳤고, 계영은 소스라치게 놀라 나아가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뻗어나간 생각의 줄기를 서둘러 잘랐다. 그 사이 소년은 가지고 온 모피 망토를 청년에게 둘러주었다. 그러자 청년은 고개를 살짝 내리더니 얼굴을 약간 옆으로 틀었다. 정숙하기로 이름 높은 그 어떤 규방의 규수에 못지 않게 다소곳한 그 모습에 계영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청년은 계영이 느끼는 정신 붕괴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긋나긋한 손길로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고 계영은 눈을 뽑아 차가운 겨울 강에 벅벅 씻고 싶다는 새로운 충동에 휩싸였다. 아 쫌! 제발 작작 좀! 쫌 사나이답게! 어? 쫌 탁탁! 어깨에 떨어진 새똥 털 듯 좀 팍팍팍! 시원하고 호쾌하게 펄럭거려서 옷을 자리잡게 하면 배탈이라도 나나? 거친 강호를 누비며 때론 불의마저 아랑곳하지 않는 거친 감수성의 계영에게 저런 한 떨기 수선화 같은 자기 연출은 거부감을 넘어 공포마저 일깨웠다.
강좌맹의 종주 매장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별볼일 없던 강좌맹을 천하제일방파로 키운 기린재자. 이 청년의 정확한 내력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단 한가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매장소 뒤에는 린신이 있다. 바로 그 린신. 린신을 떠올린 계영은 쪽 돋아오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고,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랑야방의 소각주 린신. 그는 명석했고, 무공 고수이자 의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가 강호에서 경외의 대상이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린신은 공작새였다. 그것도 호랑이마저 때려잡는 미친 공작새.
일설에 의하면 린신이 견문을 넓히려 강호를 돌아다닐 때 우연히 공작새 두 마리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귀한 공작새 중에서도 특히나 희귀한 하얀 공작새가 싸우는 모습을. 공작새는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만 봐서는 상당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고, 그래서 싸움도 격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난투를 벌여도 공작새 기본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어서 몸통보다 몇 배는 긴 꼬리는 그 개싸움을 장관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싸움이 끝나고 승리한 공작새가 활짝 펼친 꼬리를 흔들며 자태를 뽐냈을 때, 린신은 삶이 나가아야 할 방향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린신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얀 공작새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두꺼운 옷을 한 번 입을 걸 얇은 옷 세 벌을 겹쳐 입었고, 아랫단 한 번 틀 것을 세 번 틀었다. 즉 움직일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펄럭거릴 수 있나 골몰했다. 그래서 앞머리도 일부를 빼 옆으로 길게 늘어뜨렸고, 한 번 바로 뻗어 찌르면 될 상황에서 구태여 공중돌기 두 번, 제자리 돌기 세 번을 통해 충분히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펄럭거린 다음 찔렀다. 그리고 강호인을 공포로 몰아넣는 점은 이러고도 이긴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여러 비극을 불렀다.
본디 무공이 경지에 이르면 감성이 바위를 닮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여러 강호 선배들은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자기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회전을 반복하는 검법을 이해하지 못했고, 린신의 재주를 아까워했다. 린신의 검법을 분석하면 효율과 연출이 3할과 7할이었다. 효율이 아닌 연출이 7할. 그래서 강호의 내일을 염려하는 선배들은 나머지 7할, 아니 양보해서 5할을 효율에 쏟아 놀라운 검법을 만들라고 기대하며 조언했다. 하지만 린신은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랑야각 노각주도 포기할 정도로 성격이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그 성격을 굳이 고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그리고 그 사실이 비극을 불렀다. 린신의 자기 연출에 이의를 제기한 자의 앞에서 기다리는 길은 두 갈래였다. 린신이 인정하지 않는 자는 호되게 털려 평생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받아야했다. 린신이 인정하는 자라고 해도 처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린신이 잠도 재우지 않고 주장하는 <강호인의 심미안 평균을 높이는 자기 연출의 중요성개론>과 <우리가 공작새를 본받아야 하는 이유>를 들어야 했으니까. 설산에서 은둔하던 고수가 린신에게 회전수를 줄이라고 조언했다가 나흘을 붙잡혀 정신 고문을 당하고 이후 흰색이라면 질색을 해 아예 은둔 장소를 남방의 밀림지대로 옮겼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린신은 부모를 모욕하며 시비를 걸었을 때보다 정정당당한 결투를 하다 옷에 흙탕물이 튀었을 때 더 길길이 날뛰며 난리난리생난리를 쳤다. 그렇게 옷이 더러워지는 게 싫었다면 비가 온 다음 날이었던 결투 날짜를 바꾸거나 하얀 옷을 피하면 되지 않았냐는 정당한 이의제기는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험난한 강호에 몸을 던져 살아남고 자리를 잡은 사내들 중 이리저리 휘날리는 린신의 머리를 한 올도 삐쳐 나오지 않게 꽁꽁 땋아 상투를 틀고 무채색 옷을 입힌 후 저잣거리 물웅덩이에 데굴데굴 굴리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지 않은 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린신은 힘세고 머리 좋고 미친 놈이었으니까. 더러워서가 아닌 무서워서 피해야 하는 놈이었으니까.
강좌맹 종주 매장소는 바로 그 린신이 싸고도는 자였다. 린신이 저 자를 강호인으로 키웠고, 지원했고, 라이프스타일마저 전수했다. 어떻게 보면 매장소는 린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감각의 소유자였고, 그래서 계영은 두려웠다.
일단 조금 전으로 돌아가보자. 계영이 강좌맹의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매장소는 피리를 불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 피리 소리는 물안개가 자욱한 강 위로 쨍쨍하게, 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풍류라고는 기녀를 끼고 폭음하는 야매풍류 밖에 모르는 계영이라지만 이렇게 습기가 지독한 장소에선 소리가 둔탁해진다는 정도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장소의 피리소리는 건조한 날 석조 건물 안에서 부는 것처럼 쨍쨍했다. 물론 저런 소리를 낼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강호인에겐 내공이라는 만능 열쇠가 있으니까. 깊은 내공을 실어 피리를 분다면 폭포 아래에서 물을 쫄딱 뒤집어쓰면서 피리를 불어도 맑게 울릴 수 있었다. …….아마도. 하지만 매장소는 육십갑자 내공은커녕 아예 무공을 하지 못했다. 몸이 약해 말도 타지 못하고 수레로 이동했다. 그런 매장소의 피리 소리는 어떻게 조금 전 쨍쨍하게 울렸을까? 그것을 두고 강호인들은 많은 가설을 내놓았지만 그 중 가장 유력한 가설은 강좌맹이 강 곳곳에 방수처리를 한 반사판을 띄웠기 때문이라는 가설이었다. 그래서 많고 많은 그저 그런 방파 중 매장소는 일년 내내 강에 물안개가 자욱해 물에 띄운 반사판에서 시야를 차단시킬 수 있는 랑주 지역의 강좌맹을 선택했고, 영역 침범에 민감한 이유는 그 반사판을 들키기 싫어서라는 가설에 많은 강호인들이 힘을 실어주었다. 더구나 자욱한 물안개 너머에서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며 피리를 불면서 등장할 수 있으니 신비감 조성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계영은 그런 자기 연출을 자행할 수 있는 신경이 두려웠다.
물안개를 이용한 시야차단은 반사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계영의 생각이었다. 매장소가 탄 배를 생각하면 분명하지 않은가? 조금 전 매장소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는 작은 나룻배 위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서서 피리를 불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배는 사공도 없는데 매장소의 뜻대로 매끄럽게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어떻게? 여기엔 세 가지 가설이 있었다.
첫째. 사실 매장소는 무공 고수이다. 이건 신빙성이 없었다. 어느 정도 무공을 하는 자라면 매장소가 고수는커녕 누워있지 않고 저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걱정이 될 정도로 병약하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둘째. 배 밑엔 수십 개의 긴 줄이 묶여있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서 강좌맹 사람들이 그 줄을 쥐고 종주의 신호에 따라 줄을 당기며 움직인다는 가설이었다. 물안개 덕분에 그 줄이 잘 보이지 않고 숨어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에 얼핏 귀가 솔깃할 순 있지만 물안개 때문에 그 가설은 신빙성이 옅었다. 이 자욱한 물안개 너머로 신호를 보내려면 폭죽이라도 터뜨려야 할 판이었으니까. 따라서 세 번째 가설이 가장 유력했다.
셋째. 강좌맹 고수 몇 명이 대롱을 물고 배 밑에 잠수해서 배를 움직인다. 그리고 자욱한 물안개가 그 대롱을 가려준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이 가설을 내세운 사람도 수긍하는 사람도, 심지어 반대하는 사람도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강물 위로 뿅뿅 튀어나온 대롱을 보았다가는 거친 감성의 강호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심적 손상을 입게 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피리 소리를 반사판에 울리는 거? 뭐 굳이 납득하려면 납득할 수 있지는 않고, 여전히 납득할 수 없지만 관대함을 힘껏 발휘하면 넘어갈 수 있었다. 잠수부가 물밑에서 끄는 배? 영역을 지키려고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이해하면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는 척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한 가지가 계영으로 하여금 매장소를 린신보다 더한 놈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건 바로 저 모피 망토였다.
사실 계영은 처음 매장소가 린신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매장소가 병약하다 보니 린신에게 신세를 졌고, 그래서 린신을 거스르지 못하고 린신의 <하얀 공작새에게 바치는 삶의 헌정>에 어쩔 수 없이 동조한다고 생각했다. 매장소가 비록 흰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지만 과도하게 겹쳐 않고, 과도한 트임도 넣지 않고, 비록 상투를 제대로 틀지 않았다지만 앞머리는 단정하게 묶어 올려 뒤에 고정했고, 뒷머리를 늘어뜨리긴 했지만 휘날리지 않게 아래를 묶었고, 무엇보다 앞머리를 길게 내 휘날리지 않는 게 그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영은 상식인 매장소가 어쩌다 비상식적인 린신에게 신세를 져 심적으로 고생한다고 안쓰러워 하기까지 했다. 내가 어리석었지. 계영은 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어이가 없었다.
매장소는 허약하다 못해 병약했다. 이 추운 겨울에 물안개가 자욱한 강 한가운데가 건강에 해로우면 해로웠지 결코 이롭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한다면 처음부터 모피 망토를 꽁꽁 싸매고 나오는 것이 상식적인 처사였다. 그런데 매장소는 망토없이 왔다가 모두의 시선이 본인에게 모이고 난 후에야 극적인 연출을 통해 망토를 둘렀다. 왜일까? 그 비밀은 바로 한 올 한 올 부드럽게 나부끼는 모피의 상태에 있었다. 왜 매장소는 처음부터 모피 망토를 입고 나오면 될 걸 왜 꼭 저렇게 중간에 입을까 고민하던 계영은 습기와 모피의 상관관계에 생각이 미쳤고 소름이 쪽 돋았다. 저 놈은 모피가 물안개 습기를 머금고 눅지는 게 싫은 거다! 눅져서 결이 죽인 모피 망토를 두르고 남 앞에 서느니 싸늘한 한기와 습기가 몸에 나빠도 뽀송하게 하늘거리는 모피 망토를 두른 본인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가! 린신 만큼은 아니어도 자기 연출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은 강호에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계영이 알기에 자기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치장하는 사내는 없었다.
정리하자면 매장소는 반사판이 뿌려진 강에 잠수부가 움직이는 배를 띄우고 피리를 불며 등장해 모두의 시선이 모였을 때 극적인 연출과 함께 배달한 모피 망토를 걸친다. 그리고 저렇게 새침을 떤다. 계영은 저런 신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 고통은 언제나 상식인의 몫인지 억울했다.
뽀송하게 결이 살아 하늘거리는 모피를 보고 있자니 솜털이 무성한 송충이가 굼질굼질 등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차마 더는 볼 수 없어서 시선을 내리던 계영은 시야에 강이 잡히자 소스라치게 놀라 보지 말아야 할 것-예를 들어 대롱-을 보게 될까, 더럭 겁을 집어먹고 서둘러 눈의 초점을 흐렸다. 이토록 상식인이 상식의 붕괴현장에서 고통받을 때 가해자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강좌 영역에 들어온 이상 모두 내 손님입니다."
계영은 생각했다. 왜 모두 내 장난감입니다로 들리는 걸까?
"아직 피를 본 건 아니니 해결의 여지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라면 기꺼이 중재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인명을 사고파는 거라면 생각을 다시 하셨으면 합니다. 강좌 영역에서 그런 장사는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계영은 울컥했다. 물론 세력가가 백성의 땅을 빼앗게 돕는 자신이 가장 나빴다. 하지만 당쟁의 불씨를 운반하는 천천산장은 정의로운가? 억울하면 출세하라더니. 천천산장이나 강좌맹이나, 좋겠다 세력이 크니 잘난 척을 해도 누가 대놓고 빈정거리지 않아서.
뾰족거리는 마음이 고개를 들자 계영은 얼른 감정을 억눌렀다. 아니다, 집중하자. 지금 시급한 문제는 여기에서 얼른 떠나는 거다. 예전 잘 나가는 가게에서 깽판을 쳐 호족이 가게를 널름 삼키는 걸 도와주고 가게 부부가 자살하는 모습을 봤을 때 양심은 버리지 않았나. 여기서 새삼 억울해 하는 게 웃기지. 계영이 다시 한번 사과하고 후퇴하려는데 용케 얌전히 있던 의뢰인이 기어코 사단을 내고 말았다.
"저 놈들은 경국공의 노비다."
닥쳐! 계영은 외쳤다. 물론 속으로. 다짜고짜 성질을 부리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뒀더니. 결국 일을 만드는구나. 역시 뒤통수를 쳐 기절을 시켜야 했을까? 계영은 후회했다. 아무리 보이는 게 약골이랑 어린애라지만 강좌맹의 영역에서 종주가 막고 있는데 뭘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놈은? …….생각할 지도. 이래서 조정 실세인 권문세족이 싫었다. 뭐든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너무 당연해서 이렇게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초를 쳤다. 입을 막으려 주먹을 쥐는데 백씨 일족 사내는 더욱 거만한 태도로 고함을 쳤다.
"내 노비를 내가 잡아가겠다는데 네놈이 웬 참견이냐!"
...하늘이시여. 어쩐지 이 의외를 받던 날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계영뿐만이 아니라 배에 탄 쌍찰방 일원 전원이 숨을 삼켰다. 계영은 의뢰인을 지금 조질 경우 닥칠 후환과 감성을 이해할 수 없는 매장소의 심기를 건드려 생길 대참사를 저울질했다. 그때 매장소의 뒤에 있던 소년이 뚱한 표정을 하더니 경공으로 날아와 의뢰인의 비단옷 멱살을 잡아채고는 강에 내동댕이쳤다. 계영은 생각했다. 내내 거만하게 굴더니 내 속이 다 시원하-ㄹ때가 아니구나. 아무리 그래도 저건 의뢰인이니까. 건져야겠지?
"계방주, 사람을 가려서 사귀셔야겠습니다."
계영은 그래서 너랑 사귀지 않는다는 심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살다 살다 저렇게 미련한 말은 처음입니다."
다짜고짜 사람을 겨울 강에 처박는 건 세련되었다는 소리인가? 실룩거리려는 입술을 누르고 계영은 공손히 입을 열었다.
"강호인이 아니라서 여기 규칙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규칙을 알았다고 해도 다를 거라곤 장담할 수 없었지만. 평생 법에 구애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았겠지, 저 놈은. 그래도 의뢰인이니 일단 건져야한다.
"규칙을 어길 생각은 없으니 한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저 놈을 건지고, 탁청요가 랑주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몰살해야 우리 식구들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 계영은 그것 하나만 생각했다. 하지만 매장소는 계영의 바람을 묵살했다.
"강물이 아직 찹니다. 쌍찰방은 입춘 전까지 장사를 삼가는게 좋겠습니다. "
계영은 욕을 삼켰다. 입춘까지 영업을 접으라니! 피죽 먹고 살라는 소리냐! 물론 강좌맹의 영역을 침범한 쌍찰방의 과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계영은 바로 사과했다. 아무리 천하제일방파라고 해도 그렇지 이 처사는 선을 넘었다. 비굴하게 굴복하느니 전부 무너질지라도 쌍찰방의 명예를 위해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자기보다 더 큰 힘에 저항하는 건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꾸었던 낭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계영은 용기와 무모함을 구분했고, 감정과 낭만 추구 대신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하는 자였다. 인원수는 쌍찰방이 우세라지만 강좌맹 종주 호위무사 비류의 명성은 허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정말 싸움이 벌어진다면 과연 비류 하나만을 상대해야 할까? 계영은 대롱을 물고 물속에서 뛰어오를 강좌맹 고수들을 보고싶지 않았다. 심지어 그런 꼴을 한 자들과 싸워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이왕 패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좀 제대로 된 꼴을 갖춘 적수와 싸우고 싶었다. 상황이 분명하니 결정도 신속했다. 기방을 인수하려고 꿍쳤던 비자금을 풀면 그럭저럭 형제들 궁핍하게 하지 않고 겨울을 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강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의뢰인을 뒤로하고 계영은 배를 돌렸다. 강물 소리와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처량했다.
수락했던 의뢰에 실패하고, 의뢰인을 방치하고, 심지어 영업 정지까지 당했다. 하지만 배에 탄 쌍찰방 일원 그 누구도 방주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매장소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으니까. '집에 가고 싶다.' 거칠고 때론 불의에 힘을 보태는 투박한 감성을 지닌 만큼 그 반대의 감성에 취약한 이들은 더 이상 매장소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앞으로 재정이 좀 위기를 겪겠지만 모두 방주를 믿었다.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쌍찰방의 형제들을 먹여 살렸던 방주를 믿었고,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자들은 방주의 현실 감각에 감사했다. 그리고 계영은 몰래 숨겨둔 조전홍 한 병을 다 마시면 입춘까지 맛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었다.
조급함을 실었다가 우울함을 담고 돌아가는 쌍찰방의 배는 구슬픈 소리를 내며 춥고, 배고프지는 않겠지만 배 부르지도 못할 겨울을 향해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