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Kill/꽃 중위님 시리즈
중위님 중위님 꽃같은 우리들의 중위님 16
소심늘보
2012. 12. 19. 23:15
* 막둥이랑 중위님이 수상해 (12/12)
*거친 언어 주의
현재 대대는 군사 공항에 주둔 중이었다. 관제탑은 멀쩡했지만, 화물청사의 대부분은 폭격으로 무너졌다. 그 중 그나마 형태를 갖춘 곳은 장교 식당과 회의실, 그리고 장비를 보관하는 임시 창고로 사용했다. 활주로 밖의 잔디는 손질을 하지 않아 발목을 간질거릴 정도로 자랐지만, 전쟁을 마친 군인들에게는 마음껏 뛸 수 있는 운동장이었다. 그래서 해병들은 럭비나 각자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본국 귀환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텐슨이 귀대했다.
소대의 막내가 도착하자 모든 소대원들이 달려갔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해병은 마초적인 남성성을 추구했다. 그래서 만남과 헤어짐에 담담하다 못해, 무심할 정도가 되도록 감정표현을 자제했다. 가면 가냐, 오면 왔냐, 이렇게 천 년의 비바람에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그런 바위가 되고자 했다. 그러니 치명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돼 거의 죽다 살아난 다음, 치료를 받고, 재활까지 마친 전우가 부대에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전우를 이렇게까지 열렬히 환영하는 건 천재지면에 가까운 이변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텐슨 이등병은 아직 경험이 부족해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환영을 받는지 모르는 건지, 아니면 머릿속이 다른 생각-예를 들면 아주 특별한 단 한 사람-으로 꽉 찬 건지 12시 방향에서 미친 버팔로떼처럼 달려오는 선임들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3시 방향의 막사에서 막 나오는 네이트에게 달려갔다.
“중위님!”
애타게 기다리던 주인과 재회한 강아지처럼, 보이지 않는 꼬리를 열렬히 흔들며 달려오는 크리스텐슨을 맞으며 네이트도 반색했다.
“크리스텐슨!”
막사에서 패터슨 대위, 슈와체 대위, 맥그로우 대위도 나와 이등병을 맞이했다. 장교들은 질문공세를 했고, 이등병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시 후, 장교들의 얼굴도 이등병 못지 않게 환해져서 크리스텐슨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기쁨과 감격이 넘쳐흘러 주체할 수 없다는 심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던 크리스텐슨이 그 기세를 몰아 네이트를 부둥켜안았다. 저러다 아예 방방 뜰 기세였다. 네이트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등병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꼬리가 붕붕 소리까지 낼 기세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는지, 가볍게 얼싸안으며 크리스텐슨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위계질서가 산산이 무너진 그 아름답고도 당혹스러운 카오스를 보고 있자니, 전속력으로 돌진하다 목표물이 엉뚱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중간 지점에 뻘쭘히 서있던 브라보2 소대원들은 그저 기가 막혔다. 소대장에게 인사를 한 크리스텐슨이 두리번거리다 전우들을 발견했다. 이등병은 활짝 웃었다. 포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새끼, 저거, 주인님 얼굴에 침을 다 발라놓고 나니, 이제야 우리가 보이나 보다.”
크리스텐슨이 소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브라보2 일동은 볼 수 있었다. 신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온 식구의 얼굴을 침 범벅으로 만들겠다는 열의에 불타는 강아지의 영혼이 크리스텐슨의 얼굴에 드러난 것을.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받은 스태포드 상병, 즉 큐팁이 비명을 질렀다.
“멈춰, 오지마, 씨발. 안지마! 너 그 따위 존나 계집애 같은 짓을 하면 다시는 변기 안 빌려줘!”
큐팁이 진저리를 치며 고함을 지르자, 크리스텐슨이 안으려고 손을 뻗친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한 소대의 막내를 본 샤핀이 낄낄거렸다.
“야, 큐팁. 너 지금 협박, 존나 게이 같았어.”
하지만 샤핀 역시 크리스텐슨이 확 밝아진 얼굴로 다가서려 하자 소리를 빽빽지르며 거부했다.
“씨발, 존나 소름끼쳐.”
샤핀이 팔뚝을 손으로 쓸며 투덜거리자, 소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눈치를 보던 크리스텐슨도 따라 웃었다. 발딱 선 복슬복슬한 귀가 보이고, 풍차돌리기를 하는 꼬리가 보였다. 군기를 잡겠다고 잔뜩 벼르던 선임들은 결국 픽 웃고 말았다. 루디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얼굴 봐라. 자기가 무슨 폭풍을 일으켰는지 아예 모르나 봐.”
“씨발, 좋냐? 좋아? 새끼. 아주 꼬리가 떨어져 나가겠다.”
매니멀이 어이없다는 소리로 핀잔을 주었지만 크리스텐슨은 여전히 웃음을 뚝뚝 흘리며 배낭에서 가져온 선물들을 꺼냈다.
“당연히 좋죠. 데뷔탄트 볼의 저주에서 비껴갔는데. 정말 다 중위님 덕분이에요. 큐팁. 투팍 새 앨범 나왔어요.”
크리스텐슨이 잔뜩 사온 도색잡지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레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격렬한 쟁탈전을 벌이던 다른 소대원도 마찬가지였다.
“데뷔, 뭐?”
“여자들 사교계 데뷔 무도회요. 솔직히 여자들이 노닥거리는 모임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씨발, 존나 무서운 데였어요. 우리 중위님 아니었으면 제 인생이 존나 꼬일 뻔 했다니까요.”
“얘야, 크리스텐슨.”
레이가 목소리를 가다듬자, 크리스텐슨이 기괴하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대답은 했다.
“네, 퍼슨 상병님.”
“여기, 이리 와보련? 그래, 여기. 그래 잘 했어. 이제 그렇게 앉아서 처음부터 찬찬히, 차근차근,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해보렴. 존나 우리도 알아처먹을 수 있게!”
브라보2 소대가 무전병의 말에 수긍하며 이등병을 에워쌌다. 크리스텐슨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엔시노맨이 절 불렀잖아요.”
“그래, 시작 좋다. 그거부터. 그 새끼가 널 왜 불렀냐?”
“데뷔탄트 볼 날짜가 잡혔으니까 갔다 오라고 했어요.”
“그 데뷔 뭐시기는 대체 뭔데?”
“일종의 신고식이에요. 성인이 된 상류층 여자애들이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무도회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레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씨발! 너 계집애였냐? 와, 존나, 너 아나폴리스만 걷어찬 거 아니었어? 해병에 들어오려고 아예 존나 성전환 수술을 한 거냐? 씨발, 너 진짜 끝내준다.”
크리스텐슨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게 아니고요. 여기 들어오기 전에 아는 여자애랑 약속을 했거든요. 해군 사관학교에 합격했을 때요. 데뷔탄트 볼에선 여자애 한 명을 남자 둘이서 에스코트 하는데, 한 명은 턱시도를 입고 여자애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하고, 다른 한 명은 반대편에서 국기나 주((州)기를 들고 에스코트를 하는데 그걸 사관생도가 해요. 그래서 에스코트 요청이 들어왔을 때, 그러겠다고 했죠. 그러다 전 해병대에 들어왔고, 그래서 까맣게 잊었는데 갑자기 불러들이니 얼마나 황당해요. 그것도 민간인이 군대에 손까지 쓰면서. 그래서 난 사관생도도 아니고, 또 전선에 파병된 해병이니 그런 좆 같은 이유로 전선에서 빠질 수 없다고 했죠.”
에스페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짜식. 과연 중위님이 키우는 꼬맹이 답다.”
“어, 그러면 안될 텐데.”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스타이니?”
평소 소심하고 조용한 4분대의 마이클 스타인호프, 즉 스타이니가 깜짝 놀라자 루디가 상병을 돌아봤다.
“데뷔탄트 볼요. 그거 단순한 파티 같은 거 아니거든요. 동생 친구가 데뷔탄트 볼 일주일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팔이 심하게 부러졌는데도 입원도 안 하고, 얼굴 붓는다고 링거도 안 맞고, 부목한 팔을 드레스 색에 맞춘 비단보로 고정하고 진통제를 맞아가며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버텼거든요. 그러다 기절해서 입원했는데, 일주일 동안 혼수상태였고요. 그거 나가는 여자애들한테는 결혼식만큼이나 중요한 행사라던데요.”
“…….”
“…….”
“……존나 쩔어준다.”
문화충격을 받은 소대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엔시노맨이 그런 얼굴을 했나? 막둥이가 무슨 생화학 무기라도 터뜨릴 거라는 말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했잖아.”
“그때 전 데뷔탄트 볼이 여자애들한테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고, 사교클럽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캡틴 아메리카까지 와서, 데뷔탄트 볼을 망치면 여자의 한이 존나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느니, 인생을 망친다느니, 20년을 기다려 살인을 한 경우도 있다느니 지랄을 떨어서, 코커 병장님이 존나 불쌍하다는 생각만 했죠. 나중에 중위님이 오시길래 드디어 이 병신삽지랄에서 벗어나는구나 싶었는데 중위님도 얼굴이 심각해지셔서, 그제서야 제가 문제에 빠졌다는 걸 알았어요.”
잠시 말을 멈추며 생각에 잠겼던 크리스텐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존나 심각한 문제였어요. 씨발. 여자들, 존나 무서워요. 그거 아세요? 엔시노맨이랑 캡틴 아메리카는 원래 전방에 배치될 예정이 아니었대요. 엔시노맨은 해병대 럭비부로 가고, 캡틴 아메리카는 전략사 연구 쪽으로 갈 예정이었대요.”
소대원들은 처음으로 상부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그런데 왜!”
중대장과 자매소대 소대장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크리스텐슨도 마음속에서 똑같은 고함을 외쳤었다.
“난 징크스가 있거든. 경기 전에 머리를 빡빡 밀어야 경기가 잘 풀려. 그래서 결승전 날 머리를 밀었지. 그런데 그게 데뷔탄트 볼 전날이었고, 무도회에서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은 나뿐이었어. 파트너는 굉장히 화를 내며 울더군.”
슈와체 대위는 아련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난 그때 너무 긴장해서 다리에 쥐가 났어. 신이시여! 그렇게 연습했는데! 입장도, 에스코트도, 퇴장도, 왈츠도 정말 완벽하게 연습했어. 그런데 그만 쥐가 난 거야. 파트너가 무대에서 몸을 깊이 숙여 인사했고, 난 그 손을 잡아 일어서는 걸 도와야 했는데, 다리에 쥐가 난 바람에 그만 균형을 잃고 넘어졌고, 그대로 파트너 손을 잡고 무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어. 그렇게 가냘프고 예쁜 여자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괴물이 될 수 있다니. 아직도 충격이야.
맥그로우 대위는 부르르 떨었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잃은 소대원들에게 크리스텐슨이 말했다.
“그때 그 여자들이 앙심을 그대로 품고 있다가 이번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인사과를 움직여서 전선으로 배치했대요.”
“설마…….”
“그래, 그건 아무리 그래도 존나 말이 안 되지.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는 중부사령부에 대령 삼촌도 있다며.”
“그 삼촌이 그랬대요. 전선에 배치된 거 자기가 손을 써보려고 했는데 훨씬 윗선에서 움직이는 바람에 수습할 수가 없었다고.”
“와, 존나. 대령을 무력화시킬 정도면, 그 사교클럽이라는 데는 무슨 그림자 정부쯤 되냐?”
“아냐, 존나 강력한 주술집단인지도 몰라.”
“야, 상류층 여자니까, 상류층 남자랑 결혼해서 상류층이 됐겠지. 야, 설마, 그럼 우리가 정찰이랑 아무 상관없는 택배기사 노릇을 하는 것도 혹시 그 여자들이 엔시노맨이랑 캡틴 아메리카 엿먹으라고 하는 복수에 휘말린 거냐?”
“모르죠, 제가 아는 건 사교클럽에 있는 여자는 존나 무섭다는 거예요. 우리 중위님도 당한 걸요.”
“우리 중위님도?”
“중위님이 왜?”
“아냐, 가만있어봐.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씨발, 왠지 우리 중위님은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여자애들의 눈물과 순정을 즈려밟고 가셨을 것 같아. 난 이해할 수 있어. 존나 이해할 수 있다고. 존나 계집애들 우리 중위님이 너무 눈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나 있었겠냐?”
“완전 온 동네 여자애들이 자기 첫경험 상대가 돼달라고 막 몸을 던졌을 것 같아.”
“혹시 중위님이랑 파트너가 되지 못한 다른 여자애들이 한을 품어서, 우리 중위님이 이런 똥통에 떨어진 거 아냐?”
“아냐, 중위님 파트너였던 계집이 드레스를 입은 자기보다 턱시도를 입은 중위님이 훨씬 예뻐서 앙심을 품었는지도 몰라.”
크리스텐슨이 고개를 저었다.
“중위님이 아니라 중위님 어머니가 문제였어요. 옛날에 다른 여자 파트너를 가로챘거든요.”
소대원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중위님 어머님의 친한 친구 파트너였던 남자가 중위님 어머니를 보고 홀딱 반해서 파트너를 차고 어머니에게 프러포즈를 했다나 봐요.”
“하긴, 중위님을 보면 중위님 어머님도 겁나 끝내주는 미인일 것 같아.”
“어머님은 친구 파트너라서 계속 거절했는데, 그 친구가 어차피 나한테서 맘 떠난 남자 자기도 미련 없다면서 그냥 자기한테 빚진 셈치고 그냥 받아주라고 해서 두 분이 파트너가 됐고, 그 해의 왕과 여왕으로 뽑혀서 지역 신문에도 실리고, 방송국 취재도 오고 그랬대요. 그리고 두 사람은 몇 년 뒤에 결혼했고요. 그리고 그 친구와도 쭉 친구로 지냈대요.”
“그 여자 쿨하니 마음에 드네. 그런데 뭐가 문제였는데?”
“그 친구도 아들을 낳고, 중위님 어머님도 중위님을 낳고 두 아들 모두 해병이 돼서 이라크로 파병을 가게 됐는데…….”
“그런데?”
“그 친구분 아들이 바로 캡틴 아메리카였어요/”
“씨발! 깜짝이야!”
“캡틴 아메리카는 브라보 중대 3소대로 진작 발령이 났고, 우리 중위님은 다른 부대로 발령이 났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분, 그러니까 캡틴 아메리카 모친이 아무래도 아들이 걱정되니까, 중위님 어머님에게 중위님을 자매소대 소대장으로 재발령 받게 해서 캡틴 아메리카를 좀 돌봐주는 걸로 빚을 퉁치자고 했대요.”
“…….”
“……그래서 우리 소대 소대장 임명이 그렇게 늦어졌구나.”
마틸다 캠프에 소대원들은 미리 도착했었지만 소대를 지휘할 소대장의 발령은 이례적으로 지연되었었다. 장교, 부사관, 사병은 각각 개별그룹을 이루고, 또 각자의 세계에서 산다지만 전투에 나가는 부대는 지휘관과 부하가 서로 성향을 파악하고 호흡을 맞추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서 소대원들은 소대장이 늦게 와 초조해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제발 이미 많은 부분에서 전투에 부적합한 장교라는 사실을 증명한 자매소대 소대장과 같지 않기만을 빌었다.
드디어 네이트 픽 중위가 왔고, 소대원들은 소대장이 너무 예뻐서 놀라고, 맥그로우 대위와 친해서 잠시 절망하고, 경험이 많은 사병과 부사관에게 의견도 물어가며 제대로 지휘하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야, 나 진짜 얼마나 쫄았는줄 아냐? 캡틴 아메리카가 우리 중위님 이름을 부르면서 친한 척을 했을 때, 비슷한 새낀 줄 알고 존나 소름끼쳤다고. 기껏 기다렸던 소대장이 병신인줄 알고 얼마나 철렁했는데.”
“그때, 알파중대 2소대 놈들도 똥줄타서 소대장을 기다렸잖아.”
“맞아, 그러고 보니 걔네도 소대장이 늦었지.”
“우리 중위님이랑 샌드 슬라우터랑 같이 오지 않았던가?”
“맞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알파 애들이 우리 소대장님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같은 날짜에 오고, 같은 2소대 소대장이고, 같은 중위 계급이고, 같은 학사장교 출신인데, 완전 딴판이잖아. 나 같으면 존나 서류를 슬쩍해서 몇 줄 바꾼 다음에 소대장을 바꿔치기 하고 싶어질 것 같…….”
낄낄거리던 포크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크리스텐슨을 봤다. 크리스텐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원래 우리 중위님은 알파중대 2소대로 발령받았었어요. 그걸 사교클럽에서 바꾼 거죠.”
“씨발!”
“와! 존나! 사교클럽 만세다! 씨발!”
“중위님껜 정말 죄송하지만 존나 그 사교클럽이 우리 생명의 은인이다. 씨발.”
“그래서 알파 중대장 그 양반이랑 우리 중위님이 서로를 그렇게 봤구나. 그 눈빛은 완전 이거 아냐. ‘네가 내 사람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거.”
“야, 씨발아. 존나 게이 같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잠깐 그럼 뭐야. 중위님이 너한테 개인교습을 해줬다고 하셨는데 그건 무슨 소리냐?”
크리스텐슨이 벌게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중위님이 엔시노맨에게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그 여자애를 에스코트할 남자 두 명이 모두 사고를 당했대요. 사관생도는 훈련 중에 다리가 부러졌고, 다른 파트너는 음주운전 사고를 냈고요. 새 파트너를 구해야 하는데 데뷔탄트 볼 시즌이다 보니 조건에 맞는 남자 품귀현상이 일어나서 결국 나한테까지 연락이 닿은 거라고 했어요. 사정도 말해주지 않고, 그냥 가라고 하면 나더러 어쩌라고. 그래서 중위님이 깃발을 들어줄 사관생도는 패터슨 대위님을 통해 해결할 테니 저한테는 무대인사 에스코트를 하고 왈츠를 출 파트너가 되라고 했죠. 그런데 전 왈츠를 출 줄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캡틴 아메리카가 자기가 확실하게 배웠다면서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씨발. 캡틴 아메리카 허리를 잡고 왈츠를 추느니, 차라리 하지랑 키스를 하지. 다행히 중위님이 가르쳐주겠다고 하셔서 살았죠.”
“중위님 왈츠를 추시냐?”
“고등학교에 정식 교과과목으로 있었고, 어머님이 사교클럽 회장이셔서 어릴 때부터 배우셨대요.”
“잠깐, 그럼 너 뭐야! 우리 중위님 허리 잡고 춤을 췄다는 거 아냐!”
크리스텐슨이 머리를 긁었다.
“어……네…….”
“씨발, 노래는! 노래는! 노래는 뭐였어! 나 존나 틀림없이 들었거든! 우리 중위님 꿀 같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시는 거!”
“어……그러니까 스텝을 어느 정도 배운 다음에 리듬에 맞춰야 하는데, 오디오는 없고, 그래서 중위님이 노래를 부르셨어요.”
“그럼 뭐야, 너! 우리 중위님 노래도 듣고, 우리 중위님 허리도 잡고, 존나 우아하게 왈츠도 줬다는 거 아냐!”
“어……음……네, 그렇죠.”
“씨발, 부러운 새끼, 존나 부러워. 넌 전생에 사람도 구하고, 동네도 구하고, 아예 나라도 구했나 보다.. 그런데 왜 그걸 숨긴 건데!”
“그게 쪽팔리기도 했고.”
마초성을 최고로 삼는 해병이 왈츠 수업이라. 쪽팔릴만도 했다. 소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알게 되면 놀리면서 방해할 게 뻔했으니까요.”
……부정의 여지가 없었다.
“참, 엔시노맨이 건전지는 왜 줬냐?”
“마지막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춰야 하는데, 건전지가 없어서 틀지 못한다고 하니까 주더라고요.”
“씨발.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데뷔탄트 볼인 거냐?”
소대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잘 했냐?”
“네, 거의 왕과 여왕으로 뽑힐 뻔 했어요. 나중에 조금 밀려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자애가 자긴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는데 너무 고맙다고 울면서 인사했어요.”
“존나 잘 됐네.”
크리스텐슨은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궁금증이 풀려서 시원한가?”
갑자기 들려온 맑은 음성에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네이트와 마이크가 와 미소 짓고 있었다.
“레이, DADT폐지 광고를 위한 게이 결혼이라니. 자네의 독창성에 정말 감동했어.”
그때가 생각났는지 마이크는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는 싱글거리며 소대장을 맞았다.
“독창성하면 또 이 토론클럽의 제왕 레이레이지 말입니다. 그런데 사교클럽이라고요? 와, 존나 레이디스러운 거 아십니까?”
“레이, 여자를 세계를 무시하면 안돼. 특히 사교클럽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은 파트너를 빼앗겼던 복수를 하기 위해 20년을 기다렸다 살인하기도 한다고.”
“네?”
“파트너를 빼앗기는 바람에 사회지위까지 내려간 여자가 복수를 위해 원수의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뷔탄트 볼 하루 전에,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죽이는 사건은 어느 사교클럽에서나 몇 번 일어났던 일이라고.”
“와, 시발. 존나 무서운 여자들이네요.”
“그러니까, 여자들을 무시하지마, 레이.”
“그런데 너무 불공평하지 말입니다. 누군 중위님이랑 편하게 춤도 추고 노래도 듣는데, 누구는 중위님께 불타는 충성심을 바치는데도 노래 하나 듣는데 손바닥을 희생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위님, 이 레이레이와도 춤을 춰 주세요.”
네이트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고, 소대원들은 레이를 야유했다. 문득 저쪽에서 버렛 중사와 걸어가던 패터슨 대위가 왁자지껄한 소리에 이쪽을 보았고, 눈이 마주친 네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패터슨도 미소지었다.
“중위님, 아쉽지 않으세요?”
“뭐가?”
“솔직히 우리야, 멋지고 유능한 중위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지만, 중위님은 알파 쪽으로 가고 싶으셨을 거 아녜요. 패터슨 대위랑 엔시노맨은 뭐, 비교 자체가 저 양반에게 모욕이고, 또 알파 중대장은 중위님을 많이 아끼시잖아요. 물론 우리에겐 윈 중사님과 아이스맨이 있지만, 저쪽에도 역시 버렛 중사님과 포셋 병장이 있잖아요. 포셋 병장님이 사람이 좋아서 애들을 오냐오냐해서 그렇지, 죽여주는 해병이거든요. 아, 이러고 나니 이건 물어본 게 죄송해지네요. 여긴 엔시노맨이랑 캡틴 아메리카가 있으니, 완전 천국이랑 지옥 아냐. 죄송해요. 중위님이 알파로 가고 싶어하셔도 그건 다 인지상정이지 말입니다. 그리고-“
“흠……하지만 알파엔 자네가 없지, 레이.”
소대원들은 레이가 말문이 막히는 진기한 광경을 목격하고 놀라워했다. 네이트는 입만 뻥긋거리는 레이의 어깨를 툭툭 치고 일어서면서 소대원에게 말을 전했다.
“본국귀환이 시작됐어. 우린 1주일 후에 귀국할 거야. 그럼 편히 쉬어.”
소대장이 저만치 걸어가고 난 다음에서야 레이의 얼어붙은 혀가 풀렸다.
“와, 씨발! 존나! 진짜 중위님! 레이레이가 중위님을 존나 존경하지 말입니다! 마음을 다 바쳐 싸랑하지 말입니다! 레이레이는 중위님 명령이라면 존나 폭탄이 아니라 양 손에 돌덩이를 들고 하지들 소굴에 들어가서 ‘존나 이게 폭탄이다! 씨발놈들아!’ 이러면서 존나 용감하게 싸울 수 있지 말입니다! 평생 따를 거지 말입니다! 씨발! 단 한 문장으로 이 천하무적 주둥이 레이레이의 주둥이를 닥치게 하다니! 중위님은 마음만 먹으시면 존나 신도 되실 수 있을 것 같지 말입니다!!!”
미군에게 점령된 이라크의 군사 공항에 레이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
“숨바꼭질이라도 하십니까?”
네이트는 벽 하나만 위태롭게 모양을 갖추고 나머지는 전부 부서진 가장 구석진 화물청사 쪽에 있었다. 럭비에 몰두한 해병들의 구호와 함성이 들리기는 했지만 이곳은 모두가 있는 곳과는 동떨어졌다. 설마 여기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 네이트를 찾느라 고생했던 브랫은 무너진 벽을 등진 동그란 뒤통수를 보았을 때, 허탈하고 기가 막혔다. 네이트는 길게 다리를 뻗고 앉아 노을을 보다가 불쑥 나타난 브랫을 보고 조금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띠었다.
“마이크는 내가 여기 있는 거 알아.”
부루퉁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브랫을 올려보며 씩 웃은 네이트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어쩐지 얄밉다는 생각을 하며 브랫은 네이트의 옆에 앉았다.
길게 자란 잔디가 바람에 흔들려 사부작거렸다. 눈높이가 낮아지니 잔디밭 사이의 활주로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노을에 젖어 지평선까지 이어진 풀밭을 보니 사막의 나라가 아닌 초원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마저 느껴졌다.
“저한테는 말씀해 주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작고 하얀 얼굴에서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브랫은 약이 올랐다.
“무슨 일이냐고 제가 묻자, 뭐라고 하셨습니까? 개인 교습요?”
입술 끝과 닿은 하얀 살이 더 깊게 움푹 들어갔다. 노을에 젖은 하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브랫은 이것이 약간의 배신감과 짜증이라고 믿고 싶었다.
“거짓말은 아니었잖아. 그리고 재미있었고.”
“재미있으셨습니까?”
“응, 재미있었어. 그리고 자네들도 재미있었잖아.”
전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라고 항의하면 지는 거라는 생각이 어쩐지 들었다. 예쁘게 생겨서 얄밉게 말하는 저 입술을 어떡하지? 확 때려버릴까? 입술로?
……브랫은 자신이 신종 전투 증후군을 앓는다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이 소동이 1주일을 가면 좋겠는데. 그래야 크리스텐슨을 굳이 귀대시킨 의미가 있지.”
네이트의 음성은 맑았다. 하지만 브랫은 그 사이의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브랫을 보고 희미하게 웃은 네이트가 말을 이었다.
“전쟁은 끝났어, 브랫. 전투를 대비한 긴장이 풀린다는 소리지. 본국 귀환은 1주일 후야. 그때까진 이렇게 들떠야 해. 돌아가면 도움이 될지 되지 안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전문 인력을 갖춘 시스템이 있고, 가족도 있으니까.”
풀잎 사이로 솨 소리를 내며 바람이 밀려왔다. 시원해진 바람에 풋풋한 풀 내음이 실렸다. 하지만 중위의 목소리에 집중한 브랫은 바람도, 풀 내음도 느끼지 못했다.
“이 전쟁은 지금까지와는 달라. 정의로운 전쟁 따위는 없어. 그래. 나도 알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민간인 피해가 심각했어. 하지만 우린 지금까지 이렇게 노인과 아이, 여자의 피를 밟고 지난 적이 없어. 긴장이 풀리면 현실이 밀려와, 브랫. 혼란, 후회, 악몽. 난 내 소대원들이 도움의 손길이 전혀 없는 곳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하고 싶지 않아. 적어도 생각이 어둠으로 침잠할 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주고 싶어.”
“…….”
“하지만 만약 이 소동이 1주일을 가지 못하면…….”
네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한 초록색 눈이 브랫을 응시했다.
“너와 춤 출까? 달빛 아래서?”
네이트의 말간 눈을 보니 문득 알 리파 때가 생각났다.
도시 하나를 고작 험비로만 지켜야 했고, 방어태세를 갖춘 중대 뒤로 기갑부대가 이동하며 먼지를 일으켰다. 사막의 도시 알 리파에서는 코란을 읊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노을은 느릿하게 도시와 사막을 물들였다. 대대장은 사단장의 눈에 들기 위해 사병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작전에 골몰했고, 중대장은 멍청했다. 그리고 절망적인 현실과 맞닥뜨린 소대장은 바쁘게 뛰어다녔다. 농담으로 종군기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소대원들 한 명 한 명을 확인하며 다독였다. 온 힘을 다해 소대원을 지키려 했다. 그때도 지금도 노을에 물든 네이트의 얼굴은 마치 소년처럼 말개서 가슴이 시렸다. 그리고 아마도 네이트를 처음 만났을 때 움텄던 감정이 그때 크게 요동쳤다. 네이트의 눈동자 안에 담긴 자신을 보며, 이제 브랫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브랫이 눈을 끔벅이는 모습을 보며 네이트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농담이야. 너무 오래 있었어. 마이크가 날 찾을 거야.”
자리를 떠나려던 네이트가 얼어붙었다.
“농담, 아니어도 됩니다.”
소대장의 손목을 단단히 쥔 브랫이 네이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농담, 아니어도 됩니다. 중위님."
노을에 물든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당황해서 눈을 깜박이던 네이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위님. 싸랑하고 존경하옵는 우리 소대장님. 중위님이 아끼고 귀여워하시는 레이레이가 왔어요. 이 근처에 계시다고 했는데, 중사님이 찾으시지 말입니다. 혹시 혼자만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시면 말씀만 하세요. 중위님의 충실한 소대원 레이레이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스무 발 더 떨어져서 얌전히 기다릴게요. 아, 일단 노크부터 하는 이 레이레이의 멋진 매너 좀 봐. 시발, 아무 때나 험비 문을 벌컥벌컥 여는 브랫은 레이의 이 젠틀하고 문명적인 매너 좀 배워야 한다니까. 냄새 난다고 고함을 버럭버럭 지를 때마다 좆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야. 아무튼 잘 생기고 유능하고 개념이 넘치며 소대원 중 레이레이를 가장 아낄 만큼 보는 눈도 높으신 우리 중위님, 중위님의 개념과 매력과 매너가 철철 넘치는 레이레이가 왔어요. 어디 계십니까?”
“나 여기 있어, 레이.”
손을 놓아주는 브랫을 보며 네이트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 브랫. 자네가 내 분대장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마도 브랫이 소대원들을 보호하는 것을 도와주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인 네이트는 감사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요란하게 떠드는 레이의 수다와 간간이 대꾸하는 네이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제기랄.”
소대장이 가장 신임하는 분대장은, 소대장을 단지 소대장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일단 깨달은 감정은 해일처럼 밀려왔고, 폭풍처럼 영혼을 뒤흔들었다.
한 손으로 감싼 얼굴이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