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Kill/꽃 중위님 시리즈
중위님 중위님 꽃같은 우리들의 중위님 17
소심늘보
2012. 12. 28. 22:27
* 다정하게 불러주세요. (1/?)
*거친 언어 주의
평화로운 날이었다. 지긋지긋한 모래 폭풍 샤말도 불지 않았고, 뇌의 부재가 이제 의심의 단계를 지나 확신의 단계에 이른 명령도 내려오지 않았다. 날씨도 평화롭고 마음도 평화로운 이라크의 오후의 한때, 브라보2 소대원들은 지나친 매력으로 이성애자 남성마저 족족 홀려버리는 통에, 게이로서의 정체성 자각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해병의 공증까지 받은 프루디 루디의 커피타임을 만끽했다.
햇살은 좋았고 기분도 좋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커피도 맛있었다. 뇌가 말랑말랑해질 것 같은 평화롭고 느긋한 시간을 즐기던 레이 퍼슨 상병은 문득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레이의 자각은 브라보2 소대의 쿨하고 시니컬한 위생병 로버트 티모시 브라이언의 불유쾌하며 마음이 싱숭생숭한 대단히 개운하지 못한 며칠 간의 수난을 불러오게 되었다.
“닥, 우리 중위님한테 그만 좀 틱틱거리시지 말입니다. 브라이언이 자꾸 존나 불퉁하게 나오니까, 우리 중위님이, 다른 누구도 아닌, 소대원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불사할 수 있는 우리 중위님이 유독 닥한테만 거리를 두잖아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레이가 브라이언에게 화두를 던졌고, 쿨하고 시니컬하며 중대장의 면전에 대고 중대장의 두뇌가 전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할 정도로 박력도 넘치는 남자 중의 남자 브라이언은 ‘네놈 새끼의 헛소리 따위에 던져줄 내 관심은 단 1g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사를 표정을 통해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레이는 물론 그 차가운 교류제의 거절의사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아, 진짜. 닥은 존나 위기감을 좀 느끼셔야 하지 말입니다. 정말 모르시는 건지 말입니다. 야, 월트. 중위님이 네놈 새끼를 부를 때 뭐라고 부르시지?”
커피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Mk19 고속유탄 발사기를 모조리 분해해 앞에 펼쳐놓은 다음, 윤활유가 없는 상황에서 험비의 주 무기를 어떻게 고쳐야 하나 골머리를 썩던 월트 해서 상병은 미간을 찡그리며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네 미친 짓거리에 동참할 마음의 여유 따위 내게는 전혀 없다!’라는 뜻을 아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당연히 레이는 월트의 단호한 의사를 깨끗하게 무시했다.
“닥도 알다시피 우리 중위님이 저 새끼를 부르실 때는 월트라고 부르시지 말입니다? 험비에서 같이 존나 뒹구는 브랫조차 가끔 해서라고 부르며 괜히 똥폼을 잡는데, 우리 중위님은 언제나 다정하게 월트라고 부르죠.”
마침 루디가 막 뽑은 커피가 찰랑대는 모카포트를 들고 왔다. 그러자 레이의 목청이 더욱 높아졌다.
“레예즈 병장님을 봐도 알 수 있지 말입니다. 미 해병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호모 바리스타 프루디 루디도 명령을 내리거나 작전을 수행 중일 때는 레예즈라고 부르시지만 평소엔 존나 다정하게 루디라고 부르시지 말입니다. 물론 아이스맨 공인 대대 최고의 무전병, 이 레이레이를 부를 땐 언제나 다정하고 친근하게 레이라고 부르시고요.”
그 순간, 미묘한 불편함을 지닌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레이는 학사장교 출신의 중위가 소대장으로 온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물고 전우들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매우 치를 떨었다. 어쩌면 캡틴 아메리카가 소대장으로 있는 3소대를 부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굴러야 할 과정을 제대로 구르지 않은 학사장교 소대장에게 반감을 불태웠다. 하지만 네이트 픽 중위가 마틸다 캠프로 왔을 때,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본다며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브랫은 어이없어하며 구제불능의 얼빠라고 비웃었고, 레이는 천하제일 얼빠인 네놈 새끼님에게 얼빠라고 비웃음을 사다니 세상이 망하려나 보다고 받아쳤다. 소대는 물론이고 대대, 아니 연대, 아니 사단 단위로 누가누가 더 얼굴을 밝히나 토너먼트를 연다면 당당하게 우승할 브랫은 레이가 진실을 지적했는데도 조금도 머쓱해하지 않았다. 자고로 해병이라면 얼굴에 두께 5센티미터 이상의 티타늄은 기본으로 깔아야 하는 법이니까. 일단 예쁜 얼굴로 레이에게 호감 70퍼센트 이상을 확보한 네이트 픽 중위는 자신이 지닌 미덕에 얼굴만이 아닌 장교가 지녀야 할 자질도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증명했고, 그런 소대장의 앞에서 레이는 눈밭을 본 한 마리 비글이 되었다. 그리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퍼슨 상병 대신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레이레이, 혹은 레이로 고정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네이트 픽 중위는 자기관리가 아주 뛰어난 장교였다. 대대장 갓파더, 중대장 엔시노맨 자매소대 소대장 캡틴 아메리카의 무모하고, 무능하고 어이없는 짓을 목도하면서도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을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나칠 정도로 뛰어나, 소대원들이 자신들의 예쁘고 유능한 소대장의 정체는 사실 제다이 마스터다, 아니다, 인도의 아주 비밀스러운 정신수행 단체의 계승자이다, 아니다, 똥통에서 구르는 우리 처지가 너무 좆같고 짠해서 신이 몰래 보내준 천국의 성자다, 이렇게 소동을 벌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네이트 픽 중위조차도 숨은 쉬고 말하는 건지, 저러다 숨이 넘어가는 건 아닌지, 듣는 쪽이 오히려 호흡곤란이 오는 것 같은 레이의 네버엔딩 무한수다 멘탈공격을 받았을 때, 정신이 혼미해지다 못해 아스트랄계를 지나 안드로메다로 사라지는 것 같다는 얼굴을 했다. 네이트는 레이의 정신공격을 사흘간 버텼고-소대원들, 특히 브랫은 이 부분에서 깊은 감동을 넘어 존경까지 느꼈다-결국 레이의 요구를 수락했다.
픽 중위가 퍼슨 상병을 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그 과정을 떠올린 소대원들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레이의 그 폭풍 같은 수다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징한 놈이라는 뜻을 담아 시선을 레이에게 모았다. 그리고 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존나. 그렇게 꼬라들보지 좀 말지? 그 말 몰라?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 이 레이레이는 우리 중위님을 딱 봤을 때 삘이 빡 왔고, 그래서 존나 예쁘고, 멋지고, 박력쩔고, 개념차고, 유능한 우리 중위님의 귀염둥이가 돼야겠다, 이렇게 마음 먹었고, 그래서 사랑과 충성과 욕망, 아니, 이건 아니고, 아, 씨발, 브랫, 그렇게 째려보지 좀 마요, 아무튼 존나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예뻐해 달라고 재롱을 떨었고, 그래서 언제나 중위님한테 이름을 불리는 영광을 차지한 거니까.”
소대원들은 ‘그게 재롱이면 씨발씩스타가 꽥꽥거리는 씨발짓은 사랑의 세레나데겠다!!!’라는 표정을 했지만, 당연히 레이는 무시했다.
“하지만 이 레이레이가 아무리 중위님의 귀염둥이가 됐다지만 파피한테는 못 당하지. 씨발. 이 소대의 진정한 승리자이자, 레이레이는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중위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건 파피라니까? 진짜 비결이 뭐지 말입니다?”
“난 왜 걸고넘어져! 이 미친 새끼야!”
잘 마시던 커피를 뿜은 래리 션 패트릭 병장이 짜증을 냈다.
“씨발, 그럼 중위님 귀염둥이 얘기를 하는데 패트릭 병장님을 걸고넘어지지 않으면 누굴 걸고넘어져야 하지 말입니다? 저기 똥폼잡는 아이스맨요? 물론 우리 중위님이 브랫을 브랫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존나 작전 중엔 냉정하게 콜버트라고 부르면서 거리를 두시지 말입니다?”
브랫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했다. 소대원들은 브랫이 저런 표정을 하는 건 레이가 정신 나간 이야기에 자길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신건강의 안녕을 위해선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데 씨발, 우리 중위님이 패트릭 병장님은 어떻게 부르시는지 말입니다? 평소에도 파피, 작전 중에도, 파피, 무전에서도 파피. 씨발, 차라리 래리라고 아예 이름을 부르면 내가 이러질 않지 말입니다. 나랑 존나 쌤쌤이니까. 그런데 파피는 언제나 애칭으로 불리잖아요! 이래도 파피, 저래도 파피, 이렇게! 씨발, 존나 부러워! 난 아무리 레이레이라고 불러달라고 졸라도 차라리 엔시노맨이랑 세 시간 동안 토론을 하면 했지 그럴 순 없다는 표정을 하시는데, 파피는 뭐가 예뻐서 꼬박꼬박 파피라고 불러주신대요? 씨발, 비결이 뭔데요? 뭐가 그렇게 예뻐서 중위님은 파피만 그렇게 예뻐하시는데요? 악악! 부러워!”
패트릭 병장, 즉 파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자다움을 최고가치로 치며, 남창으로 불려도 발끈하기보다는 그보다 더 저속하고 거친 말로 되갚아주는 화법을 기본대화 방법으로 삼는 해병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파피는 어디까지나 패트릭을 편하게 부르자고 줄인 약칭이었다. 백 보를 양보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별명이었지, 절대로, 결단코, 등을 타고 송충이가 꾸물꾸물 기어오르는 것 같은 거부감을 주는, ‘애칭’이라 이름 붙이는 남사스러운 그 무언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의 말에 파피에 못지않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브랫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듯싶었다.
브랫은 파피를 응시했다. 그리고 ‘왜’라는 말에는 의문만이 아닌 항의, 불만, 그리고 분노조차 포함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 전 소대원들이 정신건강의 안녕을 위해 대대장조차 인정하는 기적의 해병 아이스맨이 아까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한 것은 레이가 바보 같은 이야기에 자신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애써 내린 결론을 부정했다. 그 눈이 시릴 정도의 쏘게이 호모 에로틱함에 브라보2 소대원들은 치를 떨고 몸을 떨었다.
“씨발, 저번에 대대 전체 회선이 열렸는데도 병장님을 파피라고 부르셨을 땐 말입니다. 이 레이레이는 존나 차갑고 뜨거우며 격렬하고 끔찍한 질투의 불길에 휩싸였지 말입니다.”
그 질투의 불길은 결코 레이 혼자만 태우지 않았음을 브랫은 현재 표정으로 증명했다. 파피는 얼굴을 찡그렸다. 멀쩡했던 놈이 사랑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은 분명히 말해 재미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구경꾼일 때 그렇다는 것이었다. 냉정한 저격수 패트릭 병장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자가 돼 그 진창에 끌려들어 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는 결코 모처럼 붙든 희생양의 발목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희생양을 늘리려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루디, 혹시 파피를 팹이라고 부르는 건 중위님이 파피를 꼬박꼬박 파피라고 불러서 존나 위기감을 느껴서 나만의 애칭을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파피는 존나 섬세한 우리 프루디 루디 마음을 몰라주죠? 진짜 남자들이란.”
결국, 에스페라 병장, 즉 포크가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우리 소대는 왜 이런 거야! 호모 에로틱도 모자라서 이젠 호모 치정극이냐! 씨발! 이래서 백인 쓰레기들은 구제불능이라니까!”
하지만 레이는 포크의 정신건강 안녕에 한 톨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브라이언. 현실이 이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존나 위기감을 좀 느끼라고요.”
역시 다이어트 약의 과다복용은 정신착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있던 브라이언이 냉정하게 말했다.
“뭘.”
“아, 존나. 진짜 의대 들어간 사람 맞아요?”
브라이언은 미간을 찡그렸고, 레이는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우리 중위님은 레이레이를 레이라고 부르신다고요. 루디는 루디, 작전 중에는 레예즈라고 부르시고, 파피는 파피라고 부르시죠. 그리고 브랫은 브랫, 아니면 콜버트라고 부르시고 월트는 브랫이 해서라고 부를 때도 꼬박꼬박 월트라고 부르신다고요!”
브랫의 시선이 월트를 향했다. 월트는 소대장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과 분대장이 자신을 살기등등하게 바라본다는 사실 사이의 논리적 연결고리를 생각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윤활유 없이 험비의 주 무기를 고칠 방법에 다시 골몰했다.
“그런데 브라이언은 뭐라고 부르시느냐고요. 오직 닥(Doc)이죠. 파피를 파피로 부르시는 것처럼 초지일관 닥이라고만 하시지 말입니다. 로버트도 아니고, 티모시도 아니고, 브라이언도 아니고, 오직 닥. 닥. 닥. 닥도 애칭이라고 우기는 건 브라이언 자윤데요, 모든 소대가 위생병을 닥이라고 부른다는 건 브라이언도 알죠? 그러니까 닥이란 호칭은 중위님이 브라이언을 지칭하는, 특별한 의미나 애정이 담긴 고유대명사가 절대로 될 수 없지 말입니다. 소대원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처럼 던질 장교가 바로 우리 중위님인데, 그런 우리 중위님이 소대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이름은 고사하고 성으로도 부르지 않는 소대원은 브라이언이라고요. 세상에. 원래 쿨하고 시니컬해서 아무한테나 가시를 던지는 작자라는 건 잘 알지만, 그 정도만으로 우리 중위님이 이렇게 브라이언에게 거리를 두실 리가 없지. 도대체 우리가 모르는 데서 우리 중위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브라이언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하긴 무슨 짓을 해!”
잠시 말을 멈춘 브라이언은 중위를 대했던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정이 떨어질 말만 골라 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월트, 받아.”
머리 위에서 네이트 픽 중위의 맑은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월트 앞으로 작은 검은 통이 휙 던져졌다. 얼떨결에 그 통을 받은 월트는 통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LSA였다. 제대로 된 윤활유를 받은 월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전투연대 애들한테서 뜯어왔어.”
네이트는 씩 웃었고, 월트는 키스뿐만이 아니라 군화 밑창도 손으로 싹싹 닦아줄 수 있다는 표정을 했다.
“게이브. 50구경포는 이상 없나?”
“괜찮지 말입니다, 중위님. 제 50구경 저격 소총은 제 다리만큼이나 존나 튼튼하지 말입니다.”
네이트가 게이브라고 부른 가브리엘 가르자 상병이 소대장 앞에서 가슴을 쭉 폈고, 브라이언은 인상을 구겼다. 그 모습을 본 네이트가 눈을 깜박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닥. 혹시 소대 내 구급 약품 수급에 문제가 생겼나?”
“아닙니다, 중위님.”
네이트가 로버트도 아니고, 티모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브라이언도 아닌, 오직 닥이라고 부르는 로버트 티모시 브라이언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런 문제는 신경 쓰는 쪽이 바보가 되는 문제다. 더구나 나는 남자다. 쿨하고 시니컬하며 박력이 넘치는 남자다. 거칠고 박력이 넘치며 아주 사내다운 해병이다. 소대장이 날 뭐라 부르든 그런 사소하면서 쩨쩨하고 남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사안에 나는 결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챈 레이가 낄낄거렸고, 브라이언은 사소하면서도 쪼잔하고 그러면서 자꾸 신경이 쓰이는 문제의 함정에 자신을 빠뜨린 원흉에게 눈을 부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