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Kill/꽃 중위님 시리즈
중위님 중위님 꽃같은 우리들의 중위님 20
소심늘보
2013. 1. 8. 20:55
* 다정하게 불러주세요. (4/?)
*거친 언어 주의
세상에서 가장 고치기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바로 성질머리를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무 문제 없이……아니, 문제가 없지는 않았는데, 그 문제가 자신에게는 별 상관이 없어,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복장이 터질지언정, 자신은 별문제가 없어 그 성질로 30년 가까이 잘 살던 남자가 갑자기 성격을 바꾸려 드는 일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노력했다. 이 까칠한 위생병이 최선의 노력을 했다는 사실엔 그 누구도-심지어 레이조차도-태클을 걸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 이치란 노력한다고 그 노력에 비례한 합당한 결과가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전 세계 문학들이 그렇게 줄기차게 한 목소리로 세상의 부조리함을 한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브라이언의 기특한 개심은 결국 네이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그 이유는 그동안 브라이언이 춤춘 가락, 즉 직설적이고 까칠한 가락에 네이트가 너무 길든 탓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콩을 심었더니 콩이 나온 셈이었고, 뿌린 대로 거둔 셈이었다.
그 비참한 사례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
어느 날 피난민 중에 자살폭탄 테러리스트가 잠입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브라보 2소대는 도로를 통제하고 피난민을 검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열기가 이글거리며 피어오르는 도로에 윤형 철조망을 설치해 통행을 제한하고 40명 단위로 끊어 이동시키면서 피난민을 검문했다. 얼굴과 옷, 그리고 짐에 흙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피난민들의 걸음에선 얼굴만큼이나 피로가 뚝뚝 묻어났다. 그런 피난민들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소대원들은 언제나처럼 짐을 들어주기 시작하고, 물을 나눠주고, 그러다 간이 진료실이 차려졌다. 다행히 피난민 중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브라이언은 수분을 계속 보충하고 체온을 내려야 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말이 아무 소용도 없는 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마땅한 그늘 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횡단하는 피난민들이 저 강렬한 태양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속수무책의 피난민 행렬은 까마득하게 이어졌고, 브라이언의 가슴은 답답해졌다.
미국이 개전에 앞서 언제나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독재 국가를 해방한다는 명목은 어디까지나 명목이라는 사실을 브라이언도 잘 알았다. 십자군 전쟁이 그러했듯, 그리고 그 이후의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 전쟁의 이유는 탐욕이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명목에 또 그럴듯한 모습 몇 개만 갖춰지면 억지춘향이나마 사명감과 보람을 느끼며 거지 같은 전쟁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이라크 전쟁은 처음부터 악몽이었다. 무엇 하나 그럴듯하게 합리화를 할 수 있는 구석이 없었다.
힘 있는 자들이 더 가지려는 탐욕으로 전쟁은 일어나고 그 피해는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그 중 세상이 이렇게 된 것에 관한 책임이 하나도 없는 아이들이 받는 고통이 브라이언에게 가장 아프게 다가왔다. 피난 행렬 아이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젖먹이들은 대부분 심한 열사병에 걸려, 지친 엄마의 품에서 보챌 기력도 없이 축 늘어져 힘없이 울었다. 이 아이 중 얼마나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무력감과 절망, 그리고 분노가 브라이언의 마음에 가득 차 올랐다.
그때 네이트가 왔다. 다른 때였다면 이 아이 중 대부분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독설을 퍼부었을 테지만, 브라이언은 달라지기로 했고, 그래서 화를 내는 대신 깊게 심호흡을 한 다음 네이트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일어날 무언가를 각오한듯한 중위의 얼굴을 보면서 깨달았다. 소대장은 언제나 이렇게 와주었다. 와서 독설밖에 듣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무력감에 빠진 브라이언이 화라도 낼 수 있게 항상 와주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의 행동이 부끄럽고 네이트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독설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중위님. 이대로라면 저 아이들은 며칠 버티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요. 이럴 때마다 이런 상황이 엿 같고, 제가 너무 무력하고, 너무 힘들어서 화가 납니다.”
말을 마치며 브라이언은 한숨을 쉬었다. 까칠한 독설이 주특기인 위생병이 그렇게 순순하게 나오자, 브라이언을 도와주던 스타이니 상병과 크리스토퍼 이병은 놀랐다. 소대장 역시 상병과 일병 못지않게 당황했다. 그리고 네이트의 그런 반응에 브라이언은 쓰게 웃었다. 현실은 동화 같지 않다. 그러니 마음 하나 바뀐다고 모든 것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나 침착했던 중위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가야 할 길은 멀고 험난할 것 같았다.
*****
얼마 후, 부대에서 A형 간염이 발생했다. 이 간염은 전염속도가 빨라 집단 발병은 시간문제였다. 브라이언은 마땅한 치료법이 없는 A형 간염 발생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소대를 책임진 네이트도 브라이언 못지않게 심각한 얼굴을 했다.
“지금이라도 예방접종을 한다면…….”
“하지만 만약 잠복기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때, 슈와체 대위가 네이트에게 왔다. 네이트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중대장에게 건의했다.
“중대장님. 현재 소대 내에 A형 간염이 발생했습니다. 이 병은 전염속도가 빠르고, 절대 안정 외에는 치료법도 없습니다. 그러니, 발병한 병사를 후방으로 이송해-“
“네이트.”
슈와체가 손을 들어 네이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대장님이 비니 착용시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으셨어.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엔 따로 지시사항이 내려올 때까지 당분간 비니는 착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네이트는 얼어붙었다. 브라이언은 그런 소대장을 탓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목격해도, 엔시노맨의 머저리 짓에는 사람의 영혼을 안드로메다 저 너머로 날려버리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최정예 부대는 일단 보기부터 좋아야 해. 그러니까, 네이트. 당분간 비니착용금지라고 확실하게 전달하도록.”
자기 말을 마친 중대장은 저쪽에서 보이는 3소대 소대장 맥그로우 대위를 부르며 그쪽으로 갔다. 그리고 중대장이 떠난 자리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먹먹했다.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 소대, 아니 중대 전체를 전투불능상태로 빠뜨릴지도 모르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 발생했다는데, 그깟 비니가 문제냐고! 게다가 지금은 전투 상황이라서 잘 때조차 방탄 헬멧을 착용하고 잠드는 것이 현실이었다. 엔시노맨의 어머니는 엔시노맨을 임신했을 때, 임산부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을 수차례 반복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엔시노맨이 아기였을 때, 딱딱한 바닥에 수십 번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무슨 치명적인 뇌 질환을 앓았던지. 안 그러면 저럴 수 없었다.
화를 낼 기력도 상실하게 하는 황당함에 얼이 빠져있다가 소대장을 보니 눈가가 붉어져서 눈을 열심히 깜박이고 있었다. 그 막막함을 브라이언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만약 네이트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고, 또 누군가 그런 네이트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웃는다면, 이 애처로운 소대장의 명예를 위해 그 눈치 없는 자를 혹독하게 응징하겠다고 다짐했다. 엔시노맨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충격과 경악을 안겨주는 정신 무기나 다름없었다. 가끔 당하는 것도 이런데, 장교회의에서 계속, 꾸준히, 끊임없이 저 꼴을 봐야 했을 소대장의 처지가 새삼스럽게 안쓰러웠다.
입술을 깨무는 것을 마지막으로 감정을 갈무리한 네이트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브라이언을 응시했다. 마치 순교자와도 같은 그 표정은 이렇게 말했다. ‘준비됐어. 쏴.’
……지금까지 저질렀던 행동들이 새삼스레 브라이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이 만약 기독교인이라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는 죄인에게 돌을 던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런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처치는 모두 해보겠습니다.”
말을 끝낸 브라이언이 돌아섰다. 그러자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는 브라이언에게 당황한 네이트의 시선이 등뒤로 느껴졌다. 걸음마다 황량한 먼지가 피어올랐고, 위생병은 새삼스럽게 자신에게 욕을 했다.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깨달은 폭력남편이 된 기분이었다.
*****
얼마 후, 대대장은 무장한 적대세력이 가득한 도시를 강행 돌파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지치지도 않고 또 내렸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험비와 트럭에 쏟아지는 화력은 무시무시했다. 적들은 AK소총뿐만이 아니라 RPG-7 대전차 로켓포로도 공격했다. 본격적인 무장세력이었다.
선두에 선 알파 중대와 후방의 찰리 중대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무전이 비명과 함께 끊임없이 울렸다. 그 아수라장을 브라보 2소대가 전원 무사히 상처 없이 빠져나온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지휘 차량에서 각 분대의 상황을 보고하라는 무전이 왔고, 분대원들의 환호 속에서 분대장들은 차례대로 자신의 분대가 전원 무사하다는 보고를 했다.
-알았다, 이상.
보고를 받은 소대장이 종료사인을 보냈다. 그때였다.
-맙소사! 네이트!
윈 중사의 경악에 찬 외침이 들렸고, 이어 큐팁과 크리스텐슨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회선이 닫혔다. 싸늘한 공포가 소대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