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Kill/꽃 중위님 시리즈
중위님 중위님 꽃같은 우리들의 중위님 21
소심늘보
2013. 1. 9. 22:14
* 다정하게 불러주세요. (5/?)
*거친 언어 주의
황무지로 난 도로 위로 험비가 연이어 멈춰 섰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정지한 바퀴 밑으로 누런 먼지가 피어 올랐다. 브라이언은 호출이 오기도 전에 험비에서 뛰어내려 지휘 차량으로 달려갔다. 머리 위의 태양은 저토록 뜨거운데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다른 소대원들 역시 트럭으로 모였다. 바로 조금 전, 그 끔찍했던 사지에서 무사히 빠져 나왔다는 기쁨은 누구의 얼굴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두려운 일을 떠올리는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트럭으로 다가가자 작게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윈 중사와 의견충돌이 일어난 듯,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네이트는 소대원들이 거친 발소리를 내며 모이자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소대원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소대원들은 경악했다. 네이트의 왼쪽 얼굴은 말 그대로 피범벅이었다. 그 모습을 본 거칠고 담대한 해병 수색대원들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다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얼음동상이 된 브랫의 옆에서 레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거렸을 때, 왼쪽 눈을 꾹 감고 안에 들어간 피를 손바닥으로 닦던 네이트가 선수를 쳤다.
“레이, 미리 말해두겠는데 이거 보기만큼 심각하진 않아.”
“그걸 왜 중위님이 임의대로 결정하십니까?”
또렷한 음성으로 말하는 네이트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던, 거칠고 용감하며 필요한 순간엔 망설이지 않고 사람의 멱을 따는 해병 수색대원들은 브라이언의 그 말에 다시 겁을 집어먹었다. 마치 눈앞에서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광경을 본 아이들 같았다.
“닥, 이제 출혈도 멎었어. 그러니까 처치는 대대가 합류하는 지점에 가서…….”
브라이언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소대장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상관을 대하는 부하의 불량스러운 표정의 표본으로 불릴만한 브라이언의 얼굴은 현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장 트럭에서 내려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지 않으면, 나는 아주 기분이 나쁠 것이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나의 심리상태는 너의 불행을 부르고, 나아가 소대원 전체의 불행을 부를 거라고. 한숨을 쉰 네이트는 트럭에서 내려 바퀴를 등지고 앉았다. 브라이언은 중위의 방탄 헬멧을 벗긴 후 상처부위를 찾으려 식염수로 얼굴의 피를 닦으려 했다. 그런데 네이트가 식염수 용기를 든 브라이언의 팔을 잡아 제지하고, 빙 둘러선 소대원에게 인상을 썼다.
“우리는 현재 무장세력이 가득한 적대 도시와 10Km도 채 떨어져있지 않다. 그런데 왜 내 눈엔 경계태세를 갖춘 병사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지?”
……경계태세를 하려면 소대장과 떨어져야 했다. 그것도 어디를 얼만큼 다쳤는지조차 확인이 안 된 피투성이 소대장과! 어딜 가든 덩치로 밀릴 일은 절대 없을 소대원들은 치과 출입구에 선 아이 같은 표정으로 중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지만 네이트는 충치 때문에 볼이 퉁퉁 부었으면서 치과는 무서우니 들어가기 싫다는 아이의 투정을 들어주는 어머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역시 우리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었다는 우울한 중얼거림이 들릴 것 같은 태도로 브라보 2소대원들은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레이는 세상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자길 떼놓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버티려 했지만, 네이트가 그럼 앞으로 너를 제2의 엔시노맨으로 여기겠다는 표정을 하자,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털레털레 돌아섰다.
브랫은 가장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소대장의 명령이었다. 그것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개를 쏘아 죽이라거나, 고속유탄 기관총으로 사정거리 밖의 민가를 날려버리라는 미친 명령이 아니라, 적대 도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비상사태로 부대가 멈췄으니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적의 매복을 경계하라는 명령. 정신이 또렷하다는 증거였다. 픽 중위라면 출혈과다로 정신을 놓기 직전에도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릴 거라는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브랫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슬쩍 돌아보니 브라이언이 중위의 얼굴을 식염수로 닦았다. 깨끗해진 얼굴 위로 피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네이트의 말대로 출혈이 멎은 것이다. 브랫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되뇌었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중위는 여전히 우리와, 나와 함께이다.
몇 걸음 앞에선 레이가 불안을 털어내려는 듯 에반에게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씨발, 존나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네. 기자 양반, 오늘 본 거 꼭 써요. 반드시 써요. 하지 새끼들은 우리 중위님 얼굴에 기스를 내려고 할 정도로 존나 무식한 새끼들이라고요. 아, 씨발. 지들도 눈이 있고, 생각이 있고, 감성이 있으면 이런 짓은 못하지. 그 새끼들은 존나 세계문화유산을 존중할 줄도 모르는 새끼들이라니까? 내가, 씨발, 그 새끼들이 그 뭐냐 존나 큰 불상을 파괴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어……음……레이, 미얀마 석불을 파괴한 건 탈레반이에요.”
“기자 양반, 아직도 모르겠어요? 탈레반이나 이라크 새끼들이나 똑같은 하지들이라니까? 존나 무식해서 일단 부수고 보는 좆 같은 새끼들. 씨발. 그 새끼들은 피에타를 부수려고 했던 새끼랑 사촌인 게 분명해. 그 새끼는 자기가 걸작을 만들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 같으니까, 걸작을 파괴해서라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했다며? 똑같다니까? 저 하지 새끼들도 지들이 아무리 존나 성형을 해대도 우리 중위님 얼굴의 발끝의 때만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으니까 우리 중위님 얼굴에 흉터를 만들어 화풀이를 하려고 한 거라고. 씨발 새끼들. 인류에게 내려진 축복에 감사할 줄도 몰라요. 씨발! 지 얼굴이 좆같아서 세상살기 싫으면 지들 대가리에 총알을 박지 왜 우리 중위님 얼굴을 건드리냐고, 건드리길!”
“저기, 레이. 피에타를 부수려고 했던 라즐로 토스는 자신이 예수라고 믿던 정신병자였어요.”
“그러니까 내 말이. 제정신이 박힌 놈들이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겠느냐고요.”
흥분한 레이에게는 그 어떤 말도, 협박도,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 레이의 혓바닥이 모터를 달고 돌아가기 시작하면 오직 침묵만이 유일한 선택일 뿐이다. 2소대만이 아니라 브라보 중대 전체에 전해지는 명언이었다. 에반은 그 가르침을 좇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혼자서도 잘 떠드는 레이를 보며 과연 이 방법이 도움을 주는 방법인가 회의감에 휩싸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는데, 피에타를 부수려고 했던 새끼가 사실은 파티마의 제3 예언을 공개하라고 교황을 털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그 난리를 부렸다던데, 기자 양반도 알아요? 나 그 예언 존나 궁금해. 지구가 외계인 침략으로 망할지, 아니면 힘 있는 새끼들 정신이 헤까닥 나가서 핵폭탄 발사버튼을 동시에 눌러서 망할지 진짜 존나 궁금하다니까?”
“그 파티마 제3 예언서는 2000년에 교황청에서 공개했어요, 레이. 세계 대전이나 멸망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죠.”
“아, 기자 양반, 존나 순진하시네. 허슬러에 기사는 어떻게 쓰셨나 몰라. 그걸 믿어요? 그렇게 존나 뻔하고 동화 같은 내용이면 바티칸에서 왜 여태까지 숨겼겠어요? 세계 멸망에 관한 내용이라니까? 그런데 수도사였던 새끼도 머리가 돌아서 하이재킹까지 하며 예언서를 밝히라고 하니까, 대충 설렁설렁 꾸민 거라고.”
“흠……글쎄요. 권력은 내용이 아니라 은폐에서 오지 않을까요? 그 뻔한 내용을 바티칸은 의도적으로 숨겼고, 그래서 그 비밀스러운 행동이 의혹을 부르고, 의혹은 공포를 불렀을 것 같은데요? 공포에 빠진 신자만큼 종교인이 다루기 쉬운 집단은 없죠.”
“역시, 씨발.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내가 기자 양반을 딱 봤을 때, 첫눈에 느꼈다니까. 와, 씨발 저 양반은 존나 음모론자에, 좌파에 불신자에 성격이 존나 꼬였을 거라고. 존나 브랫만큼이나 신한테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인간인 줄 내가 알아봤지. 씨발, 존나 맘에 들어. 기자 양반. 내가 쟈스민 좀 빌려드릴까?”
레이와 에반은 예언서의 내용이 세계 멸망이냐, 아니면 단순한 내용인데 세력 확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의혹을 증폭시킨 정치적인 은폐냐를 두고 열띤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는 소대원들의 표정을 썩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네이트는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그 대화에 피식 웃었다.
네이트의 말대로 출혈량에 비해 상처는 깊지 않았다. 파편이 관자놀이 안쪽을 스치며 가벼운 열상을 냈는데, 모세혈관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브라이언은 상처를 봉합하고, 약을 바르고, 습윤밴드를 붙였다. 그리고 왠지 모를 의무감에 휩싸여 남은 식염수로 네이트의 얼굴에서 사막의 먼지도 말끔하게 닦았다. 상처가 오염될까 봐 이러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했지만, 관자놀이 쪽에 난 상처 때문에 목까지 닦는다는 것이 얼마나 궁색한 변명인지 스스로도 잘 알았다.
“미안해.”
네, 당연히 미안해 하셔야죠. 제가 중위님 때문에 여섯 살짜리 애새끼도 떠올리지 않을 구차한 변명을 주절거리니 말입니다 하고 생각하던 브라이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네이트를 마주 보았다.
“뭐가 말입니까?”
“해군에서 해병대로 올 때, 이런 걸 기대하진 않았을 거 아냐.”
꼭 사기결혼 피해자라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던 브라이언은 얼른 그 소름 끼치는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이비리그 출신이 해병대로 올 때 역시 이런 걸 기대하진 않았겠죠. 중위님은 모르시는 모양인데, 원래 군대란 좆 같고, 전쟁은 더 좆 같은 법입니다.”
“하지만 좀 덜 좆 같을 수도 있었겠지.”
네이트는 노골적인 음담패설을 하지는 않지만, 입이 꽤 험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저 얼굴과 목소리가 욕을 욕처럼 들리지 않게 했고, 또 욕을 들은 쪽에서 욕을 들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얼굴과 지금 말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브라이언은 피식 웃었고, 네이트도 미소 지었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속으로 힘차게 욕했다.
네이트 픽 중위는 웃을 때, 자신의 반경 1미터-마음 같아서는 10미터라고 하고 싶었지만, 브라이언은 관대하게도 전쟁이라는 현실을 기꺼이 고려했다-이내에 사람이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등을 켜야 한다. 중위의 웃는 얼굴도 위험한데, 현재 두 사람의 구도도 아주 위험했다. 네이트는 브라이언보다 키가 컸다. 그래서 이렇게 내려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지금 브라이언은 자신을 올려보며 웃는 네이트를 마주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씨발, 브랫 그 망할 놈은 어떻게 이런 중위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렇게 멀쩡할……아니, 멀쩡한 척 할 수 있지? 브라이언은 정신이 없었다. 녹색, 연두색, 노란색이 함께 어우러지는 중위의 눈에 자꾸 홀리는 것 같았다. 무슨 블랙홀에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무슨 눈이 이렇담?
눈을 떼야 했다. 이건 위험했다. 뭐가 위험한지 자세히 생각하기는 싫지만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기분도 점점 이상해졌다. 그래서 눈을 떼고 싶은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음 한편에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야. 풍만한 가슴을 지닌 미녀가 눈앞에서 걸어가면 도덕적 판단과 선택에 앞서 눈이 먼저 따라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그 변명이 든 예시의 부적절함에 브라이언은 한층 더 깊은 절망에 휩싸였다.
난 브랫과 달라. 절대로 달라. 분명히. ……그래야 해. ……그러고 싶어. ……그럴 수 있을까?
“닥?”
느닷없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라는 얼굴을 하는 브라이언을 올려보며 네이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중위가 자신을 부르는, 저 거리감 느껴지는 호칭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데 자신이 과연 브랫과 아주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정면돌파하자. 그게 남자다운 행동이지. 깨끗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브라이언은 조금 전 중위의 피투성이 얼굴을 보았을 때 느꼈던 절망을 떠올렸다. 그때 브라이언은 되돌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신에게 마음속으로 절규했었다.
심호흡을 한 브라이언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위님. 제가 성격이 좀 꼬였습니다.”
“응, 알아.”
……차라리 비꼬는 표정이라면 좋았을 텐데. 악의나 조롱이라고는 조금도 담지 않은 눈으로 브라이언을 올려보며 네이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했을 때, 그 사실이 사실이라고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브라이언의 머릿속은 그대로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었습니다.”
성격이 꼬여서 말을 해도 독설만 골라서 했고, 그래서 죄송하고, 앞으론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겠다고 말하려던 계획도 하얘진 머릿속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브라이언은 의료장비를 챙긴 후 몸을 일으켜 자신의 험비로 돌아갔다. 네이트는 트럭에 올라 소대의 이동을 지시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험비로 돌아가는 길이 참 길고, 막막하고, 서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레이가 방금 광경을 보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브라이언은 스스로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