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Kill

회지 샘플 1

소심늘보 2017. 6. 9. 22:23



#0. D-3



 

세상이 온통 붉었다. 마치 화염에 타들어간 시체의 살이 갈라져 드러난 심장처럼 새빨갰다. 브랫은 까마득한 어두움 속으로 추락하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한계를 넘긴 몸이 비명을 질렀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놓고 쓰러져 눈을 감아버리고만 싶었다. 피와 땀이 들어가 쓰린 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어두워진 세상을 거칠게 날뛰는 심장 고동 소리와 숨소리가 뒤흔들었다. 멸망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 그리고 전부를 잃고, 마침내 최후의 심판의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지금까지 해야 했던 고생과 희생,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헛수고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친 전사가 된 기분이었다.

 

헐떡일 때마다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날뛰는 숨을 누르며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자 냄새가 밀려왔다. 옆에 강이 흐르는 낡은 건물 냄새였다. 축축한 먼지 냄새, 서늘하고 눅눅한 시멘트벽 냄새, 시큼한 곰팡이 냄새, 습기를 머금고 가라앉는 화약 냄새, 그리고 피 냄새.

 

충격에 밀려 잠시 뒤로 물러섰던 현실이 성큼 몰려왔다.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고 분노가 저주받은 불길처럼 브랫의 온몸을 휘감았다. 증오와 절망과 수치심이 예리한 얼음 비수가 되어 소용돌이쳤다. 유능한 경호요원은 눈을 부릅뜨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있는 배신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달려들어 짐승처럼 포효하며 찢어버리고 싶은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이 거짓이기를,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악몽이기를, 그래서 여전히 소중한 연인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비참했다. 구질구질했다. 하지만 증오하고 부숴버리기엔, 거짓과 배신이었다고 가차없이 잘라내기엔 브랫에게 지난 사흘은 너무도 애틋하고 소중했다. 현실과 간절한 바람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고 브랫은 절망을 곱씹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마음은 어느새 매달리고 있었다. 거짓이어도 좋았다. 빤히 보이는 얕은 핑계여도 상관없었다. 변명만 해주면 못이기는 척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랫은 이런 스스로가 너무 비참했지만 지난 사흘은 너무나도……

 

그랬다. 사흘. 단 사흘이었다. 벼락처럼 나타나 점령군처럼 마음에 들어오고, 브랫의 영혼을 차지하고, 마침내 세상을 뒤흔들어 바꾸는데 사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브랫은 그렇게 기적처럼 찾아온 연인의 배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어떤 변명이든 해주기만 한다면 믿을 수 있다는 간절한 바람과 함께 브랫은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이었다.

 

보고 싶지 않아도 생명을 끊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경호에 대비해야 하는 일종의 직업병이었으니까. 급소를 노린 상처는 기계처럼 정확했고, 그 어떤 망설임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기꺼이 속을 준비가 되어있는 브랫에게 현실은 어디까지나 잔인했다. 그래도 브랫은 속고 싶었다. 이 광란의 살육 현장이 어떤 오해이기를, 결백한 연인이 터무니없는 함정에 빠진 것이기를 간절하게 기원했다. 하지만 마침내 시선이 마주친 순간 브랫은 현실을 인정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눈 속엔 브랫이 찾고자 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고한 피해자의 당혹도, 공포도, 공황도, 믿어달라는 호소도, 애원도 그 아무 것도 없었다. 있다면 인생의 울타리 밖 타인을 바라보는 듯한 무감한 시선뿐이었다.

 

얼음물 양동이를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 것도 아니었어. 그래,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였어. 브랫은 입술을 깨물었다. 함께 하는 내일을 향해 조금씩 내딛는 그 한 걸음이 얼마나 어려웠고, 얼마나 치열한 고민의 무게가 실렸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런 것 따위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저항하고, 항복하고, 무릎 꿇고, 무참하고 아름다운 정복자의 발 앞에 바친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알 바 아니었던 것이다. 함께하는 내일을 꿈꾸며, 행복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순서가 늦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설레며 입맞추던 마음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속수무책으로 내보인 진심을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미련에 잠시 발목이 잡혔던 분노가 사슬을 끊고 다시 날뛰었다. 소중하고 애틋했던 만큼 증오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브랫을 몰아세웠다. 턱까지 차오르는 진흙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격렬한 감정이 브랫의 등을 떠밀었다. 원인을 없애버리면 미칠 것 같은 이 분노와 증오와 후회와 수치심이 사라질까? 저 새끼가 사라지면 지난 사흘간의 기억도, 감정도 사라질까? 다시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눈에 들어간 피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타오르는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힘겹게, 하지만 단호하게 걸음을 뗐다. 오직 증오의 힘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다려.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감정적으로 나갈 일이 아니야. 이 일의 첫 번째 규칙 잊었어? 프로잖아.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마.

 

이성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브랫은 입술을 비틀었다.

 

지랄, 프로는 사람 아니냐? 해탈한 성인이라도 돼?

 

이성에 반발하며 다시 걸음을 떼자 이성은 더욱 엄격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의뢰인을 패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브랫은 콧방귀를 뀌었다.

 

말은 바로 하시지? 의뢰인은 패터슨이야. 저 새끼가 아니라.

 

자고로 프로란 디테일을 챙기는 법. 브랫은 계약의 정확한 사항을 지적했고, 이성은 맥락을 건너뛰고 분절된 파편을 들이미는 브랫에게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브랫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확고하게 걸음을 뗐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저 잘난 얼굴에 한방은 먹여야 앞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야!

 

브랫은 코끝을 실룩거렸다. 지금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브랫 본인의 이성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지적하면 지금 이 상황은 약간, 아니, 상당히 괴상한 자아분열 역할극이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브랫은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얼빠지는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어이없었다.

 

보호? 보오호오?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그 보호? 지금 그 보호를 저거한테 해야 한다는 소리야? 분위기 전환용 농담이야? 아니면 반어법인가? 냉손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아무리 내가 하는 소리라지만 이건 어떻게 변명을 해줄 수 없을 정도로 유머 감각이 끔찍하군.

 

브랫은 걸을 때마다 발이 거치적거려 짜증을 냈고, 이성은 발에 채이는 시체를 물끄러미 보며 입을 다물었다. 브랫은 빈정거렸다.

 

보호를 해야 한다면 저 새끼한테서 세상을 보호하면 보호했지 저 새끼를 보호? !

 

확실히 그랬다. 지금 이 상황은 만약 사신이 협동체제가 아니라 일인사업이라면, 국제 노동 기준은커녕 제3국 노동환경에도 미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 고소를 고려할 정도로 대학살의 수라장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의 주범을 가리켜 보호 대상이라고 지칭하는 건 이보다 더 부적절할 수 없기는 했다. 이성은 멋쩍어서 헛기침을 했고, 브랫은 냉정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죽이든, 후려치든, 멱살을 잡든, 속에서 날뛰는 이 감정을 폭력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이성은 다급해져서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대로 커리어를 날릴 셈이야? 네 기준을 스스로 무너뜨리겠다고?

 

그 지적에 브랫은 걸음을 멈추었다. 승기를 잡은 이성은 얼른 말을 이었다.

 

이번엔 어떤 핑계도 대지 못해. 네가 완벽하게 네 뜻으로 한 선택이니까. 다시는 스스로를 믿지 못할 거야.

 

그 지적은 브랫의 가장 아픈 구석을 정확하게 찔렀다. 기억의 창고 가장 깊은 곳에 묻었던 장면이 되살아났다. 눈앞에서 의뢰인이 피를 뿜으며 고꾸라지던 장면이었다. 브랫이 개인적으로 깊이 혐오하던 작자였다. 그 사건 이후 브랫은 지옥을 경험했다. 혐오와 경멸이 경호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주제에 경호를 계속해도 될까.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간을 보내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그대로 평생 쓸모 없는 쓰레기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전선에서 무능한 장교들 명령대로 굴러야 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그 두려움은 브랫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브랫은 철칙 한 가지를 세웠다. 의뢰인에게 호의든 혐오든 사적인 감정을 가지지 말 것.

 

어떻게 보면 이번엔 실패한 셈이지만 아직 루비콘 강을 건넌 건 아니었다. 돌이킬 수 있었다. 감정을 누르고 비즈니스적인 거리까지 물러서면 된다. 브랫은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공기와 함께 밀려드는 대학살의 냄새는 신경써서 무시했다. 그리고 이성의 목소리를 따랐다.

 

지금 널 집어삼키는 감정 대신 이 일을 무사히 마친 다음 얻을 보상을 생각해봐.

 

브랫은 상상했다. 마침내 마당에 당당하게 자리잡을 존더크라프트파르조이크181, 일명 티거의 모습을. 마당을 상상하니 현재 엉망이 된 집 꼬락서니가 자동연상되었지만, 이왕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으니 패터슨에게 복구비용은 물론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철저하게 청구하는 상상으로 마무리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마음이 진정됐다. 이 일이 끝나면 휴가를 길게 떠나는 것도 괜찮겠지. 브랫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계획했던 호화로운 휴양지 대신 사막으로 떠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패터슨에게 부탁해 티거도 운반하고 직접 가동하는 거야. 힘차게 전진하는 티거의 엔진소리를 상상하니 기분이 상당히 근사해졌다. 이제 저 새끼가 배신자든, 심지어 매국노라고 해도 철저한 비즈니스의 미소를 띠고 사무적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브랫은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서 감정을 지우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힘차게,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디디고,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지극히 프로세셔널하지 못한 감정을 한껏 실은 주먹을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둘렀다.

 

주먹과 얼굴이 충돌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리고 저속한 의사표현이 바로 뒤를 이었다. 다양한 의사표현 중에서 특히 종교인의 금욕맹세의 불성실한 수행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유전적 이유와 관계간의 권력불균형 때문에 많은 문화권에서 금기시하는 근친상간에 관한 심도 높은 고찰이 돋보였다. 그 의견들을 경청하며 브랫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사흘 동안 마음에 담고, 애간장을 끓여가며 사랑했던 사람은 브랫이 껍데기에 홀려 멋대로 착각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요란하게 부서지며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브랫의 커리어가 박살나는 소리였다. 스스로 정한 금기를 자기 손을 깬 대가는 호되게 치르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브랫은 후회하지 않았다. 괜찮은 척, 사무적으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그게 불가능할 정도로 마음은 컸고, 그래서 이 망할 새끼가 비웃음을 터뜨렸을 때,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양호한 반응이지. 아니, 오히려 총을 꺼내 쏘지 않고 주먹만 날린 스스로의 자제력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욕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레퍼토리가 어찌나 다양한지, 중복 항목 없이 메들리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랑의 종말에 이보다 더 적합한 BGM이 있을 수 있을까? 브랫은 다채로운 욕설의 향연 속에서 지난 사흘 동안 고민하고, 용기 내고, 욕심 내고, 쭉 각오했던 혼자뿐인 내일이 아닌 함께 하는 내일을 꿈꾸며 설레던 감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디오스, 내 사랑. 내 눈 먼 환상이 만들었던 만큼 넌 지독하게 아름다웠고, 나만을 위한 운명 같았지. 널 만나기 위해 태어났고, 네가 기다리고 있기에 지금까지의 인생이 그렇게 좆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헛소리였지. 이 꼬라지를 보라지. 영원히 가지지 못할 축복을 미련스럽게 탐낸 멍청이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이 아닌가? 망할 인생. 어리석은 브랫 콜버트. 멍청한 새끼야.

 

비탄에 빠진 브랫은 비장하게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심술궂은 운명을 저주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절규할 법도 한데 브랫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했다. 세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마냥 운명을 원망하고 저주하기엔 운명은 이미 충분히 경고를 하고, 주의를 주고, 심지어 피할 기회까지 줬기 때문이었다. 그걸 굳이 다 뿌리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자기합리화까지 해가며 자기 발로 시궁창에 철벅철벅 걸어 들어간 건 브랫 자신이었다. 심지어 그뿐인가? 만약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서 사흘 전, 아니 이틀 전으로라도 되돌아간다면 과연 현명하게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을 할까? 브랫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러지 않으리라는 데 티거의 엔진을 걸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브랫은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서리쳤다. 본인의 멍청함과 한심함과 구질구질한 미련과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하고, 확고하고, 단호하고, 절대적인 취향과 외형중시 가치관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알아도 고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끔찍했다. 지금 브랫의 심정은그냥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눈앞에서 쫙 편 후, 검지랑 중지를 빼고 나머지 손가락을 오므린 다음 그대로 눈을 푹 찌르고 싶었다. 왜 왼쪽 눈뿐이냐면, 이렇게 호되게 당했으니 다음부턴 얼굴에 홀려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게 될 거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들을 때, 오른손을 들어 남은 눈도 찔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있는 힘껏 때렸는데 얼굴 어디가 찢어져서 흉이라도 남으면 어떡하냐고 안절부절못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라고 묻는다면 우물쭈물 말을 돌리다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아니, 어쩌면 레테 강물을 마시고 나서도 똑 같은 짓을 반복할지도 몰랐다. 브랫은 이런 스스로가 정말 싫었다.

 

창고 밖에선 푸르스름하게 깔렸던 땅거미가 밤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도시의 강은 묵묵히 흘렀다. 검은 수면 위로 달이 잘게 부서졌다. 마치 산산조각난 브랫의 순정을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