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s me 1
브랫네잇 브랫네이트
Kiss me
태양이 이글거렸다. 아니, 이글거린다는 말로는 무시무시하게 내리 꽂히며 모든 생명의 수분을 말려 세상을 불모지로 만들 기세인 이 폭염의 작살을 설명하기에 부족했다. 사막과 동물이라는 조건을 제시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사막에 최적화된 낙타조차 그늘을 만들어 쉬게 해주지 않으면 주인의 머리를 물어뜯을 것 같은 날씨였다. 대부분의 테크놀로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된 요즘에도 여전히 사막의 운송수단으로 각광받는 낙타조차 이럴진데 환경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 인간이 이런 불볕더위에서 뛰어다닌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해병은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카테고리 중 정상인으로 분류되면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지고 심지어 정체성의 위기까지 겪는 그런 족속들이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심하게, 참신하고 독보적인 미친 짓으로 크레이지 킹의 새 경지를 여는 전설이 되는 건 해병이라면 누구나 은밀하게 품는 간절한 욕망이었다. 그런 자들이 세월이 흐른 뒤 지금 이 순간을 돌이켜 생각할 때 ‘그때 우리는 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이라크의 한낮이란 얼마나 무시무시한 더위더냐? 그래서 나와 전우들은 모두 그늘에서 더위가 한풀 꺾이길 기다리고 있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을 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유였다. 미해병수색대 제1수색대대원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살인적인 땡볕 아래에서 럭비를 하고, 혹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비지땀을 흘리는 이유는.
디와니야 군산업복합체의 무너진 건물 한 켠에 만든 체력단련장은 지극히 해병다웠다. 태생부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운동기구는 단 한 개도 없다는 소리였다. 당연했다. 돈 많은 육군이라면 모를까, 캠프에 PX 하나 설치해주지 못하는 해병이 임시주둔지에 운동기구를 보내줄 수 있을 리가. 그래서 해병에게서 땀을 쫙쫙 빼주는 운동기구는 출생을 따져 거슬러 올라가면 전차와 트럭에 다다르는, 해병은 되게 한다 정신이 낳은 DIY의 눈부신 산물이었다. 인간의 창의력과 적응력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난폭하고 무자비한 자연을 정복해 문명을 일으킨 인간의 창의력이 이렇게나 위대했다. 지지리궁상을 자기 기만과 자포자기로 포장해 괜히 언론플레이를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절대로.
그런데 시야를 굴절시키는 열기 속에서 운동하는 해병 중 브라보 중대 2소대원들은 특히나 더 열심히 운동했다. 이 혹독한 환경에서 시리도록 지나친 그들의 젊음이 묘한 감상을 자극했다. 왜? 어째서? 왜 저들은 저렇게까지 심하게 운동하는 걸까? 아무리 봐도 운동하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진 않아. 그래, 그러기에 저 모습은 지나치지. 아무리 해병수색대가 미친 또라-아니, 과잉 남성성을 노출하지 못해 안날내는 집단이라지만 저렇게까지 하는 건 많이 이상하지. 혹시 저들은 운동이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잊고 싶은 기억을 떨치려 몸을 혹사하는 게 아닐까? 몸이 힘들면 머릿속에 잡념이 사라진다잖아. 그래, 그러고 보면 저들이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니기는 하지. 유프라테스를 점령하는 최초의 정복자 타이틀은 빼앗겼고, 이라크에서 무장세력과 처음 대치했을 때, 교전은커녕 말 그대로 손을 흔들며 보내줘야 했잖아? 얼마나 치욕적이었겠어? 그리고 투항하면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삐라를 쥔 이라크 군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물병만 쥐어주고 다시 사지로 등 떠밀어야 했지. 중대장은 또 어떻고? 부대를 믿음직스럽게 이끌기는 고사하고 트라우마만 남겼잖아? 만약 중대장이 공중지원요청 프로토콜을 헷갈리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 덜 멍청했다면 저들 중 남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 아냐, 아군 폭탄 맞고 다 죽어서. 지금까지 지나온 마을 중에서 눈앞에서 잿더미로 변한 곳은 몇 군데였더라? 여자와 아이, 노인만 남은 마을이었는데. 그리도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은 무아파키아였지. 동네 꼬맹이들조차 편을 갈라 전쟁 놀이를 할 때도 ‘여기 길 양쪽에 숨어있다가 몰래 덤벼야지.’라고 생각할 매복공격 최적의 지점으로 정찰도 없이, 그것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야에 밀고 들어갔다가 십자포화 과녁이 됐었으니까.
그래, 어쩌면 이 감상적인 추측대로 브라보2소대원들은 잊고 싶은 기억을 잊으려고 몸을 혹사하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 모든 일들은 그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전쟁은 끝났고, 귀환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고, 수백 명 해병수색대원 대부분은 20대였으니까. 그리고 원래 해병이란 허세에 살고 허세에 죽는 허세의 일족이라지만, 브라보2소대원들의 허세는 남달랐다.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해병끼리만 있어도 가슴을 부풀리며 허세 경쟁에 빠지기 마련인데, 이들은 전쟁 내내 민간인, 그것도 기자와 동행했다. 공식적인 매체에 해병이라는 존재의 주장과 사상을 남기는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소대원들은 각자 해병수색대원 대표가 된 듯한 책임을 느꼈고, 그래서 해병이, 특히 해병수색대원이 얼마나 위험하고 용맹한 집단인지 대중에게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하고, 차별주의에 절었고, 인식은 전근대에 멈춰있으며,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상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따라서 고칠 의사도 없고, 이런 내가 당당하고, 그러나 한편으론 위험 앞에선 얼마나 두려움이 없고, 전우와 시민을 지키기 위해 용맹할 수 있고, 동시에 그렇다고 일반 사회에 풀어놓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야수라는 캐릭터 해석으로 매소드 연기를 펼친 바람에 이들은 아직도 역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일반 해병의 허세가 구애의 춤을 추는 공작새라면, 브라보2소대원들의 허세는 극락조에게서 구애의 춤을 추는 공작새였고, 지금 열심히 꼬리 자랑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지루한 대기 상황에서 2소대원들은 시간을 죽이며 거의 강박적으로 생각했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고, 나 같은 놈들이 우글거리는 이 위기 상황에서 용맹한 해병은 어떤 행동을 할까? 그래서였다. 테런과 일대일 격투를 하다 패한 매니멀이 그래도 근력은 자기가 몇 수 위라고 시비를 건 이유는. 그리고 평소라면 테런은 유치한 기싸움이나 도발에 거리를 두고 혼자 고고하고 침착하게 품위를 지켰다. 하지만 지루함이 안개를 일으켜 테런의 냉철한 판단력을 흐렸는지, 매니멀의 시비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테런이 낚이자 흥분한 매니멀은 본인의 근력을 뻥튀기하며 허세를 부렸고, 테런은 그 허세에 질 수 없다는 뜻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 결과-
태양은 이글거렸다. 공기는 뜨거웠다. 그래서 샤핀을 짜증을 냈고, 스타이니의 온화한 표정이 흔들렸다. 두 사람이 각각 올라가 앉은 트럭 타이어도 뜨거웠고, 타이어 다섯 개를 묶은 사슬도 뜨거웠다.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을 멘 어깨도 뜨거웠고, 사슬 끝을 쥔 손도 뜨거웠다. 피가 몰린 매니멀과 테런의 얼굴도 뜨거웠고, 온몸에서 흐르는 비지땀도 뜨거웠다. 이토록 뜨거운 열기에 갇혀 악문 잇새로 신음까지 흘리며 두 해병은 안간힘을 썼지만, 타이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캠코더로 찍는 릴리만 열심히 움직일 뿐이었고, 두 사람을 구경하며 야유하는 소대원들만 신날 뿐이었다.
사실 2소대 뿐만이 아니라 기다리느라 심심한 해병들에게 힘겨루기 도발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발의 위력은 참으로 무시무시했다. 집단특성상 허세는 허세와 부딪칠 수밖에 없고, 커다란 허세가 부른 남다른 허세는 결국 도전 내용 자체가 메타 휴먼이 아닌 보통 인간인 이상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내용이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도발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수행이 불가능한 미션 임파서블 속에서 장렬하게 산화할지언정,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 새끼에게 단 한 조각의 승리감도 맛보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해병이 이렇게나 성숙하고 남자다웠다. 같이 진창을 뒹굴면 뒹굴었지 날 엿 먹이려 한 새끼가 웃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다는 이런 단호함은 일반적인 상식 밖에 갖추지 못한 시민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었다.
그리고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이 어이없는 승부의 유혹에서, 정치와 종교,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힌 교묘한 언론플레이에 현혹되지 않고 그 너머의 진실을 날카롭게 꿰뚫는 사색가이자, 전위적이고 대담하고 진솔한 시각으로 세상의 이치를 전파하는 철학가이자, 마음만 먹는다면 잠도 자지 않고 쉴 새 없이 떠들 수 있는 달변가인 레이조차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바그다드를 떠나 디와니야에 도착한 이후, 레이는 계속 우울한 모습을 보였다. 감정기복도 심해 럭비 시합 도중 루디에게 시비까지 걸었다. 불안정한 레이의 모습은 신발 속을 굴러다니는 돌 조각처럼 해병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레이가 변한 대외적인 이유는 과다 복용했던 다이어트 약의 중단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일리는 있었다. 다이어트 약이나 카페인이 일으키는 각성과 흥분은 미래의 활력을 지금 당겨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원리였으니까. 무기력하고 우울한 시기가 찾아오는 부작용이 닥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침울하게 가라앉은 레이 상태가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라는 걸 모두 알았다. 레이의 지금 상태는 우울하게 가라앉은 마음의 틈새로 일찍 스며든 PTSD였다. 그래서 예전 활발한 레이를 두고 해병들은 재앙이라고 농담했지만, 우울하게 가라앉은 레이는 진지한 두려움이었다.
해병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어떤 고난도, 제 아무리 강력한 적도 전우와 함께라면 두려움 없이 정면에서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의 적을 향하는 용기와 마침내 닥쳐버린 ‘그 순간’ 부서진 내 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는 달랐다. 그래서 대부분 망가진 본인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에게서 가족에게서 친구에게서 달아나 허세 속으로 숨기 마련이었다. 현재 상황을 인정해야 해결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지만 그건 홀로 적진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고, 그래서 대부분 실패했다. 기회를 놓치면 본인 뿐만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마저 망가뜨린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진실에서 달아나 버릴 그 순간을 레이는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에게 다이어트 약이 몰렸다. 약을 먹고 기운 내서 좀 뽈뽈거리고 다니라는 투박한 걱정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거울에 비친 부서진 모습을 피하고 싶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아무튼 그렇게 레이는 다시 다이어트 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활기를 되찾았고, 레이는 루디를 찾아가 시비를 걸어서 미안하다고 남자답게 사과했다. 사랑이 넘치는 루디 역시 사나이답게 사과를 받아들이고 화해의 선물로 근사한 커피도 끓여줬다. 다이어트 약과 커피의 카페인이 레이의 혈관을 돌며 활력과 자신감과 의욕을 자극했다. 이것이 비극을 불렀다.
나흘 동안 밀렸던 수다를 한 시간 동안 해치운 레이는 잠시 숨을 고르며 벤치프레스에서 운동하는 가르자를 바라보았다. 파이프와 전차 바퀴로 만든 역기는 움직일 때마다 바퀴들이 서로 부딪쳐 철컹거리는 소리가 나고, 양쪽에 다섯 개씩 매단 바퀴의 무게를 파이프가 이기지 못해 조금 휘어졌지만, 가르자는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레이는 무심하게 생각했다. 가르자는 소대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평을 듣는데 어쩌면 대대에서 가장 힘이 센지도 모르겠다고. 역기가 오르내리고 철컹거리는 소리가 마르고 뜨거운 공기를 흔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소리가 레이의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그게 끝이야? 그냥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마는 거야? 저 새끼가 누리는 명예가 과연 정당할까? 저 자리는 혹시 다른 사람이 원래 주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대대 최고 천하장사라는 왕좌엔 어쩌면 레이 퍼슨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을지도 몰라. 네가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누려야 할 영예를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거야?
흥분과 자신감에 피가 끓어올랐다. 평소 비리비리하다고 놀리던 소대원들이 경악하는 얼굴이 레이의 머릿속에서 이미 현실인양 떠올랐다. 세상을 한 손으로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솟았다. 그래서 레이는 보무도 당당하게 가르자에게 갔다. 그리고 선언했다. 정당한 경쟁을 통해 원래 내게 속해야 했던 명예를 되찾겠노라고. 가슴을 쫙 펴고, 가르자에게 힘을 겨뤄보자고 도전하는 레이의 모습은 당당했다. 마치 왕과 후계자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틈타, 7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이어지는 혈연을 근거로 왕좌를 찬탈한 머나먼 친척 앞에서 신분을 밝히는 황태자처럼. 이 신성한 권리요구 선언 앞에서 소대원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전율했다. 그리고 마땅히 보여야 할 경의를 표했다.
샤핀과 스타이니는 얼른 타이어에서 내려 두 사람 쪽으로 달려왔다. 매니멀과 테런 역시 무모한 멍청이라는 공동불명예에 신속하게 타협하고 달려왔다. 릴리는 캠코더의 메모리와 건전지를 바꿔 끼우며 달려왔다. 그렇게 모든 소대원들이 서둘러 레이와 가르자를 둘러쌌다. 얼핏 보면 수십 년은 놀릴 수 있는 구경거리를 좀 더 잘 보려고 명당자리를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당치않은 오해였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순간의 참관인이 되려는 영광을 누리려고 할 뿐이었다. 소리 없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트럼블리는 뚱한 표정으로 참스를 입에서 굴리며 승부에 왜 심판이 없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정당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스탠포드가 에스페라를 추천했다. 그러자 샤핀이 다인종간 승부에서 백인차별자가 과연 심판으로 적절한가 이의를 제기했다. 에스페라는 분을 참지 못하며 자긴 백인차별주의자가 아니라 모든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결백을 주장했다. 크리스토퍼가 한 손을 들며 심판감시자로 브라이언을 추천했다. 브라이언은 부당한 전쟁과 부조리한 군대조직에 대한 분노와 그러나 결국 그 시스템의 일부인 본인을 향한 환멸에 우울해하는 자기를 이 우스꽝스러운 일에 끌어들이는 건 부당하다고 독설을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에스페라가 더 빨랐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백인이 유색인에게 모든 권한을 줄 리가 없지. 눈곱만한 권한을 떼주며 총을 든 노예감독관을 붙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오줌도 싸지 못하는 족속이 바로 너희 백인이라는 족속이라며 세상을 망치는 백인 이론을 들먹이며 부리부리한 눈을 부라리고 울분을 터뜨렸다. 주제의 자극성에서도, 관중을 휘어잡는 흡입력에서도, 화술의 박력에서도 에스페라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브라이언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고독한 남자를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힘을 겨루는 방법은 역기를 들어올릴 때마다 전차 바퀴를 추가하기로 하고, 먼저 가르자가 끼우고 운동하던 전차바퀴 열 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레이는 벤치프레스에 누워 월트와 로벨이 파이프에 전차바퀴를 다 끼우길 기다렸다. 그리고 소대원들에게 내기 판돈을 자기에게 걸라며 큰소리를 쳤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결전의 순간이 찾아왔다. 눈을 빛내며 기대하는 관객들의 집중 속에서 에스페라가 경기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3초 후.
무시무시한 무게에 가슴이 짓눌린 레이는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레이는 역기를 들지도 못했다. 로벨과 월트가 동료에게 먹이는 엿이야말로 삶의 활력소가 아니겠냐는 이심전심 눈 신호를 음흉하게 나눈 다음 레이가 역기를 들어올리려고 힘을 줄 때 양쪽에서 몰래 들고 다시 내렸을 때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역기가 똑바로 내려오지 않고 이상하게 가슴 쪽으로 내려온다고 레이가 이상하게 생각한 순간 이미 때는 늦어 전차바퀴 열 개를 단 파이프에 짓눌린 뒤였다. 욕을 하고 저주하는 레이에게 두 사람은 뻔뻔하게 제대로 머리나 목에 내렸으면 네가 살아남겠냐며 우리의 전우애에 감사하라고 뻐긴 다음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무도 가엾고 불쌍하고 처량한 레이를 도와주지 않았다. 릴리는 레이의 얼굴을 좀 더 극적으로 담으려고 이리저리 카메라 앵글을 바꿔가며 촬영했고, 소대원들은 웃음소리로 음향효과를 높였다. 전우의 쪽팔림은 곧 내 기쁨이라는 해병 정신이 빛나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고통과 수치심을 약이 바싹바싹 오르는 레이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튀어나오는 저 키. 잘못 볼 수가 없었다. 레이를 보호하고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는 레이의 분대장이었다. 하지만 레이의 분대장은 의무를 지킬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자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레이를 보더니 등을 돌리려고 했다. 레이의 혈관을 돌며 카페인이 야기시킨 근거 없는 자신감이 무시무시한 분노와 억울함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천하장사라는 타이틀에는 납득은커녕, 가능성의 여지도 없지만, 공포의 주둥이라는 타이틀에는 정당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며 모두에게 퍼부어지던 레이의 저주와 욕설이 무차별난사에서 조준사격으로 바뀌었다. 위기에 빠진 팀원을 외면하는 인정머리 없는 분대장이라는 주제로 초당 세 마디 이상이라는 놀라운 속도와 기상천외하고 다채로운 어휘로 언어의 향연을 펼쳤다. 아이스맨의 명성에 낀 거품의 대상이 마침내 성기에 이르렀을 때, 브랫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인연을 주관하는 신을 저주하며 레이를 누른 역기를 치워줬다. 물론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카페인을 지나치게 섭취한 건 아닌지 하는 상냥하고 다정한 걱정은 당연히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무시무시한 구박의 서막이 열렸다. 성인 등급 작품 속 자격 없는 부모가 기립박수를 치며 열광하고 수강신청을 할 정도로 무자비한 구박의 칼바람이 휘몰아쳤지만 거기에 눈 하나 깜박할 레이가 아니었다. 내 눈깔 하나엔 네 눈깔 전부, 내 이빨 하나에도 역시 네 이빨 전부라는 정신으로 맞받아쳤고, 거기에 당황할 브랫 역시 아니기에 두 사람은 해병의 입은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나 살아있는 증거로 변해 해병욕설 대백과사전을 넘기기 시작했다. 릴리의 캠코더가 바쁘게 돌아갔다.
먼저 제1부 <커피로 비유하는 해병 욕설의 강도>를 펼친 후 프롤로그 <육.해.공군과 더불어 나누는 아메리카노>를 가볍게 훑고, 제1장 <차별화의 시작, 싱글샷>를 기점으로 <더블샷>,<트리플샷>을 거쳐 마침내 <본격적인 해병의 걸죽함, 쿼드샷>에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브랫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표정관리를 시작했다. 브래의 표정은 일반시민이라면 실수로라도 저런 사람과는 절대로 얽히지 말자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에서 언제라도 달아날 듯 제멋대로이지만, 동시에 세상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소년처럼 순진하지만 성인의 위험함도 함께 느껴지는 그런 분의기를 의도하는 듯한 야리꾸리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꼴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해야 하는 레이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리고 영혼이 절규했다. ‘그렇게 치명적이고 섹시하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지닌 척 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우리 앞에서 궁둥이를 까고 똥을 싸지 말았어야지. 이 똥쟁이 병장님아!’ 도색잡지에 투고하다 처음 종군한 기자도 인상 깊어할 정도로 소대 이동 도중 험비에서 내려 구덩이를 파고 똥을 싸는 브랫의 모습은 참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브랫은 마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자기는 어디까지나 매력적이고 자기관리에 철저한 바람둥이라는 듯 폼을 잡고 있었다. 레이가 마음만 먹는다면 준엄하고 냉혹한 진실의 50가지 반사판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레이가 브랫의 저 표정을 보자마자 설명할 수 있다는 소리는 저 꼬라지를 수없이 보아왔다는 소리였고, 그 말은 즉, 저 표정이 향하는 대상 역시 안다는 소리였고, 브랫 표정이 저렇게 변했다는 소리는 그 대상이 다가온다는 소리였다. 브랫 역시 레이 못지않게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아 꼬장꼬장하게 태클을 걸고 싶다는 격렬한 충동을 자극하는 표정변화가 레이의 얼굴에서도 일어났다. 레이는 경련하는 브랫의 입꼬리를 못 본 척하며 표정 만들기에 집중했다. 순하게, 무해하게, 이왕이면 귀엽게. 마치 어울리는 별명은 ‘공포의 주둥이’가 아니라 ‘천사의 속삭임’이라는 듯.
상황이 참 요상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 황당한 전개를 보며 욕하는 소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전원이 각자 본인이 생각하기에 최고로 착하고, 순종적이고, 부드러운 표정을 뒤집어쓰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한바탕 가증의 폭풍이 몰아치고, 얌전한 양의 탈을 쓴 2소대원들으 모두 브랫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경애해 마지 않는 소대장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