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LT는 셰프를 꿈꾸는가 5
Generation Kill/Ordinary Days View Comments
브랫네이트 네이트브랫 리버시블
5.
제발 알아줬으면 해서 눈앞에서 대놓고 해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나 싶을 정도로 눈치채지 못해서 사람 속 터지게 만들고, 그냥 흘려 보내줬으면 싶은 건 당황할 정도로 또렷하게 기억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사람 뒤통수를 치는 작자가 바로 네이트였다. 그런데 내가 그 앞에서 할라피뇨 치즈 타령을 했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다음 할라피뇨 치즈 타령을 하면서 피넛 버터에 짜증을 낸 새끼가 바로 나 새끼였다. 그러니 누굴 원망할 수 있을까? 다 내가 자초한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때 내가 달리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피넛 버터를 집어 던지기 몇 시간 전, 나는 네이트를 잃는다고 생각했었다. 내 눈앞에서 네이트가 죽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우리 소대는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작전지역 지도를 본 순간 난 생각했었다. 내가 적이라면 다리 앞에 장애물을 설치해 진입을 막고 도시와 도로 양 옆에 잠복했다가 발이 묶인 적에게 집중공격을 할 거라고. 그런 지점에 우리는 사전 정찰도 허락 받지 못하고 야간 작전을 수행했었다. 그리고 무아파키아로 진입하는 다리와 도로에 설치된 장애물에 발이 묶여버렸다. 진입 경로도 막히고 험비가 엉켜 후진 경로도 차단된 순간 매복했던 적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고 우리 소대는 옴짝달싹 못하고 쏟아지는 총탄과 RPG포탄의 타겟이 되었다. 말 그대로 킬 존(kill zone)에 갇혀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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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날아오는데 비해 RPG포탄은 험비에 명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운이 언제까지 이어진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포탄이 한 대만 제대로 맞으면 험비는 화염에 휩싸일 테고,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해도 사방에서 화력을 퍼붓고 있으니 바로 벌집이 될 상황이었다. 그때 포탄이 험비 바퀴 바로 옆으로 떨어져 터지면서 차체가 흔들렸다.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며 경로를 확보하던 레이가 욕을 하고, 월트와 트럼블리는 동요하지 않고 대응사격을 했다. 뒷자리에 앉은 기자는 용케 겁에 질려 패닉을 일으키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조용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가 질릴 정도로 침착했다. 아드레날린 덕분일 수도 있고, 참전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 삶에 미련을 둘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도 몰랐다. 지척에서 폭발한 진동 때문에 험비가 세 번째 흔들렸다. 어쩌면 내 시신은 온전히 관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삶이 끝나도 달리 미련은 없었다. 내 오토바이로 캘리포니아 도로를 달리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그때 문득 생각이 네이트에게 닿았다.
그래, 이렇게 끝나는 것도 괜찮겠지. 내 것이 될 수 없는 과분한 사람과의 인연이 예정대로 끊어지기 전에, 감정을 정리하려고 허우적거리기 전에 이 인연 속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누굴 마음에 담지도 누군가의 마음에 내가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혼자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끝도 나쁘지 않았다. 가면무도회가 끝나 가면을 벗고 비참한 현실로 돌아가기 전에 이렇게 무도회가 한창일 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바라지 못했던 행운이 아닌가.
험비에 튕긴 총알이 방탄모에 부딪쳤다. 네이트는 괜찮을까? 소대 전체가 십자포화 과녁 상태였지만 내가 탄 선두차량 보다야 두 대 뒤에 있는 지휘 차량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을 느낀 순간, 2분대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무전이 들리고 잠시 후 소대장이 도보로 이동 중이라는 윈의 다급한 무전이 들렸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터지는 폭발음과 총성 사이로 흙과 자갈을 밟으며 달리는 군화 소리가 들렸다. 피가 얼어붙었다.
밥티스타와 루디, 릴리에게 우회해서 빠져나가라고 차례대로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를 폭발음이 계속 끊었다. 나는 단 한순간도 돌아볼 수 없었다. 사격을 잠시라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지고 포탄이 날아오는 그 죽음의 길을 달리는 네이트를 보게 된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조차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2분대 험비가 방향을 돌리고 주행하는 소리가 들린 후 포크의 차량이 방향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등 뒤, 레이의 운전석 너머로 방탄 조끼와 험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거친 숨소리가 바로 들리지 않았다면 난 그대로 얼어붙었을 지도 모른다.
팔뚝을 걸친 험비의 창턱에 총알이 부딪치자 작은 불똥이 튀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뒤에서 여전히 들렸다. 저 숨소리가 언제 멎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숨을 쉴 수 없었다. 지금 바로 총알이 네이트를 관통할지 몰랐다. 아니면 RPG포탄이 네이트에게 맞을 수도 있었다. 신경이 바늘처럼 곤두섰다. 당장 몸을 돌려 네이트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겨 험비 뒷자리에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라 이를 악물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왜?
포크의 차량이 빠져나가자 네이트가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리고 달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네이트의 등이 시선 끝에 잡혔다. 날카롭게 공기를 찢는 총알 소리와 발포 소리와 RPG포탄이 폭발하는 소리. 달리는 길이 계속 총알에 패였다. 사신의 망토 같은 그 길을 네이트가 달리고 있었다. 권총 하나만 든 채. 그 모습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사이 네이트가 총을 맞고 쓰러질까 봐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심장이 얼어붙고 머리가 웅웅거렸다. 네이트가 무사히 지휘 차량에 도착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기에 네이트는 너무 약해 보였고, 무방비했다. 정복을 입고 네이트의 관을 든 내 모습이 보였다. 얼어붙은 심장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네이트가 지휘 차량에서 내려 다시 올라타기까지 약 2분 남진한 시간 동안 나는 영원의 공포에 갇혔다.
중대와 합류한 후 나는 분대원들 상태도 점검하지 않고 바로 지휘 차량으로 향했다. 중간에 포크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지만 의식까지 닿지는 못했다. 브라이언이 파피에게 응급처치를 하는 2분대를 지나자 지휘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부상자호송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린 후 험비 문이 열리고 네이트가 내렸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날 올려봤다.
난 화가 났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냐고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부드러운 입술에서 새어 나온 하얀 입김이 싸늘한 새벽 공기 속에서 흩어졌고, 무아파키아에 퍼붓는 폭탄의 섬광이 녹색 눈 속에서 빛났다. 그 눈을 본 순간 깨달았다. 좆됐구나. 난 완전히 좆됐구나.
하려던 말은 산산이 흩어졌고 입을 꾹 다물고 다시 뒤돌아 험비로 돌아가는 내 발 밑이 소리없이 무너졌다.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너무 빠지지 않게 감정조절을 했고 그걸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네이트의 관계는 전선에서의 일탈이지 진짜는 될 수 없었다. 앞으로의 네이트의 인생에 내 자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을 알고 시작했고, 내 것이 아닌 것을 잠시 쥐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는 건 익숙했다. 그래서 이 관계의 끝이 왔을 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게 너무 빠지지 않게 조심했고,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인연이 끝나고 서로 갈 길로 가야할 때, 좋은 추억으로 날 기억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손을 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감정이 피자가 식 듯 식지 않아도 시간과 함께 정리되리라고 믿었다. 개소리. 완전히 착각이었다. 정강이에 미치지 못하는 개울에서 물장구를 친다고 생각했는데, 턱을 넘기고도 계속 차오르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감정이, 마음이 언제 이렇게 깊어진 걸까? 만약 네이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었을까? 네이트의 미래에 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미래에 네이트가 없다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난 완전히 망했다. 감정이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친 건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중학교 시절부터 함께였던 약혼녀가 친구와 날 배신했을 때, 글쎄 충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고등학교 진학 대신 기숙사제 군사학교에 끌려들어가 한참을 만나지 못하고, 또 졸업하면서 부모에게 반항하려고 입대하는 바람에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만날 때마다 점점 지쳐가는 그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그녀에게서 어떤 징조를 읽었고, 그녀가 한참을 고민하다 꺼내려는 말을 일부러 막았었다. 그 짓을 몇 번 저질렀고, 그래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내게 청첩장을 내밀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는 대신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두 사람과의 우정을 이어올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깨끗하게 정리하려고 했던 순간을 내가 몇 번이나 망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둘이 악역을 떠맡게 된 게 미안하면 미안했지 나는 두 사람에게 화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있어서 네이트와의 이 관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처음부터 끝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감정은 눈이 멀어 속수무책으로 깊어졌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 것이 될 수 없은 사람을 내 인생에 묶어두고 싶은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이 사람을 잃는다면 미칠 것 같다는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대책없이 빠져버린 내게 화가 났고, 빠뜨린 네이트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감정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감정을 깨닫는 원인을 제공한 오늘 새벽의 작전에 화를 냈다. 그것도 깨닫지 말아야 할 것을 깨닫게 해서가 아니라 죽을 뻔해서 화가 난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비겁했다. 진짜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부딪쳐 해결하는 대신 달아났다. 그리고 이런 내 비겁함은 결국 네이트에게 지독하게 상처를 입히고 우리 둘 모두를 엉망으로 만들게 된다.
이렇게 나 자신을 속이려고 들 정도로 난 비겁했지만 그래도 내 위치를 잊을 정도로 정신머리가 나가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소대원 새끼들은 몰살당할 뻔했다고 살기등등할 텐데 내가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면 '그' 아이스맨도 화를 냈다면서 아주 기세 등등해질 게 분명했다. 소대원 새끼들만이면 다행이지. 아예 중대원 새끼들 전부 활개를 칠 수도 있었다. 집단, 특히 군대에서의 유명세가 이렇게 좆같았다. 내 감정이 내 감정만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새끼들이 터뜨리는 감정을 정당화시키는 핑계가 됐다. 그렇게 전부 불평을 터뜨리고 균열이 일어나게 할 순 없었다. 일단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고, 그래서 난 3분대 에릭 새끼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새끼. 언젠가부터 저 새끼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토템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이 좆같고 상황이 짜증나도 저 새끼만 보면 누구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가진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어제 우리도 죽을 뻔했지만 저 새끼도 죽을 뻔했다. 그리고 네이트와 3소대 소대장의 대처는 아주 달랐다. 에릭 새끼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꼴을 보니 과연 마음이 숙연해졌다. 우리 소대 새끼들도 에릭 새끼를 힐끔거리면서 우리도 좆같은 작전 때문에 죽을 뻔했지만 우리 소대장은 우리 살리려고 총알이 빗발치는 그 지옥을 권총 하나 달랑 들고 뛰어들어 우릴 살려냈지만 저 새끼 소대장은 선두차량이 이미 적진에 진입했는데 나머지 차량이 다리에서 발이 묶였다고 패닉이나 일으키고 후퇴 명령도 내리지 않았냐고 수근거리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감정이 가라앉았고, 그래서 난 피넛 버터를 내던지면서 바닥에 남은 짜증의 앙금도 같이 내던질 수 있었다.
아무도 내가 정말로 할라피뇨 치즈가 나오지 않고 피넛 버터만 나와 짜증낸다는 걸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한 행동이었다. 이 상황이 존나 짜증나는 상황이지만, 짜증내도 되는 상황도 아니니, 짜증나게 짜증내지 말라고 경고를 하면서 내 감정도 조금 턴 행동이었다. 아무리 할리피뇨 치즈를 환장할 정도로 좋아해도 그렇지 죽다 살아난 상황에서 내가 정말 음식 투정을 한다고 생각할 새끼가 어디 있겠나? ...네이트 빼고는. 제기랄.
네이트가 보기에 내가 몰살의 위기를 넘긴 후 가장 먼저 보인 감정적인 반응이 할라피뇨 치즈 타령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편견을 가지기에 충분히 위험한데 이라크 해방작전 공식 종전 후 디와니야 군사시설로 이동한 후 휴게실에서 다른 새끼들이 릴리가 찍은 영상을 볼 때 나 혼자 따로 앉아서 크래커에 할라피뇨 치즈를 발라 처먹고 있었으니 네이트가 나를 할라피뇨에 환장해서 일정 기간 이상 할라피뇨를 섭취하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키는 새끼라고 단정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말로 무리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팝콘 그릇에 할라피뇨를 가득 담아오는 네이트를 보며 저 인간은 적정선이란 걸 모르는 걸까라고 속으로 비난하는 대신 내 탓이로소이다, 이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로소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리고 네이트가 나를 할라피뇨 중독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덕분에 네이트가 만든 음식에 미각이 마비될 정도로할라피뇨를 퍼부어서 먹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네이트가 이렇게나 내게 완벽한 연인이었다. 남 탓을 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냉소적인 비웃음 대신 최악의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얼마나 인생에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인가. 빌어먹을.
네이트는 예전 이라크에서 전투연대에서 삥뜯어온 LSA를 내밀 때처럼 환하게 웃으며 할라피뇨 그릇을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내가 할라피뇨를 스튜 접시에 퍽퍽 퍼넣는 동안 자기 시리얼 그릇에 우유를 부었다. 그랬다. 이상한 점을 눈치챘는가? 네이트는 내게 이따위를 처먹으라고 하고는 자긴 시리얼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네이트 역시 이 스튜가 일반적인 미각의 소유자가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넘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네이트가 왜 내게 이걸 먹으라고 내밀었을까? 사디스트라서? 아니면 내가 뭘 잘못해서 날 엿먹이려고? 차라리 그러면 좋게. 지금 내 앞에 놓인 시련은 네이트의 사랑의 열매이자 내 손으로 연 지옥문에서 나온 재앙이었다.
그랬다. 나는 지옥문을 열고 평생 모르고 지나갈 수 있었던 진실을 내 손으로 끄집어냈다. 보통 진실의 힘은 강력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림자 속에 숨었던 진실의 파급력은 특히 컸다. 그런 진실과 대면한다는 것은 하얗게 달아오른 인두로 낙인이 찍히는 것 같았다. 인두를 떼도 열기는 계속 살 속을 파고들어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난 그렇게 찍힌 낙인이 심장 위에 있다.
물씬 올라오는 끔찍한 비린내를 맡으며 난 운명의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 내 삶의 질을 형편없이 떨어뜨리고 말았던 운명의 그날. 그날을 떠올리면 그 아침의 모든 것이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하늘의 색깔, 구름의 모양, 공기의 냄새, 시트에서 올라오는 체취, 그리고 그때까지 느껴본 적이 없던 곳에서 올라오는 낯선 통증까지. 모든 것이 생생했다. 하긴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지.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날은 만년설처럼 영원한 순결의 상징으로 남을 줄 알았던 브래들리 콜버트의 체리가 따먹힌 역사적인 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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