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다툼은 당신들 다툼보다 품위 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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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 임수. 린신. 린각주.


 

감정의 물꼬가 터지자 임수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서러웠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던 임수에게 이런 억울함은 처음-

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종종 있었다. 세상이, 사람들이 얼마나 매정했었나 임수는 그 얼울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친척 꼬맹이들이 귀찮게 굴어서 나무에 묶어버렸을 때, 몰래 꺼내온 아버지의 활이 마음먹은 대로 구부러지지 않자 짜증이 나 내동댕이쳤는데 돌에 부딪쳐 큰 흠집이 났을 때, 태황태후 증조할머니께서 모두 나눠먹으라고 간식을 내렸을 때, 경염의 몫을 다 먹고, 그것도 모자라 경예 몫의 간식까지 반 이상 먹었을 때, 그때마다 임수는 미리 경염과 짜고 경염이 한 짓이라고 말했는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머니도, 심지어 경우 형님도 아무도 내 거짓말에 속지 않고, 가 아니라, 내 말을 믿지 않고 나만 벌줬었지. 그때 정말 서럽고 억울-

임수는 회상을 멈췄다. 그리고 양심이 따끔거려서 볼을 긁었다. , 나라는 새끼, 완전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인 애새끼였구나. 내가 정말 경염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네. , 그러고 보니 동해로 출전하는 녀석한테 달걀만한 진주를 가져오라고 장난쳤는데 그러지 말 걸. 그리고 비둘기 알만한 진주는 돼야 한다고 또 장난쳤는데, , 진짜 그러지 말 걸. 그 고지식한 녀석은 정말 비둘기 알만한 진주를 찾으려고 할 텐데. …걔 혹시 전투가 끝나도 진주를 찾지 못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거 아냐? 진짜 나라는 새끼는! 경염, 내가 참 미안했다. 그 빚들은 꼭 갚을게.

본인의 서러움을 셈하다 본인으로 인한 남의 억울함을 깨닫고 깊은 반성을 하는 임수의 귀에 린 각주의 무거운 음성이 들렸다.

그런데 저 아이를 발견했을 때 상태가 어땠길래 화한독이 저리 깊게 중독된 거냐?”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온몸의 뼈가 부러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전부 부러지고 조각났는데 거기에 화독과 한독이 스며들어 부딪쳤으니 말 그대로 화한독이 골수까지 사무쳤겠죠.”

매령의 절벽이 떠오르자 임수는 몸을 떨었다. 떨어졌을 때 느꼈던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날카로운 바람소리,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는 몸, 피가 위로 쏠리는 느낌.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절벽에서 떨어진 거냐?”

떨어진 게 아니고 누가 떨어뜨렸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를 떠올린 임수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잠시 후 다시 린 각주가 말을 했다. 마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그런 각오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네가 결국엔 기어코.”

아 쫌!”

린신이 벌컥 화를 냈고 린 각주는 낄낄거렸다. 그리고 임수는 불안에 휩싸였다. 조금 전 린 각주 같은 사려 깊은 대인에게서 어쩌다 린신 같은 망나니 아들이 나왔을까 한탄했었는데 그 의견을 철회해야 할 것 같았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 어쩌면 굉장히 위험한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임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아이 부친이더냐?”

그럼 달리 누가 있었겠습니까?”

혀가 굳어 말을 못 할 텐데 용케 알아들었구나. 그런데 저 아이 성격에 그런 말을 하더냐?”

하지 않았다. 안 했다. 절대로. 그런데 어떻게 저 새끼가 아는 거지? 혹시 보고 있었나? 하지만 린신은 임수의 의혹을 부정했다.

말씀대로 혀가 저 모양인데 말은 무슨 말을 합니까? 잠꼬대를 할 때 입모양이 떨어뜨리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 상황 보면 딱 답이 나오잖습니까. 금릉의 재앙이라고 불리는 저 놈이 만약 다른 사람이 떨어뜨렸다면 절 얌전히 따라왔겠습니까? 의식을 차리자마자 떨어뜨린 놈 시체라도 찢겠다고 절벽을 기어오르죠. 정보만 있으면 다 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머리는 장식이 아니니까요.”

넌 참 한마디를 해도 정말 재수없게 말하는 재주를 지녔구나.”

임수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지 않다니.”

한 마디도 지려고 들질 않지.”

혀를 찬 린 각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저 아이로선 안타까운 노릇이구나. 설개충에 물리기 전 부상이 조금만 가벼웠어도 상황이 나았을 텐데. 독이 심하게 스며들어 치료 과정도 힘들겠고, 저 아이가 버틸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구나.”

자식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다니. 그 욱하는 성질머리가 문제죠.”

그건 그렇다.”

맞다. 바로 그랬다. 임수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수는 아버지 임섭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누군가 아버지를 모욕한다면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못 할 일이 없었다.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질머리를 비난하는 소리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임섭의 성격이 좀 그랬다. 한마디로 불같고 욱하는 면이 있었다.

저 아이를 절벽에서 떨어뜨리지만 않았어도…”

린 각주가 말꼬리를 흐리자 임수의 미래 역시 흐려졌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내세울 정도로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지도 못할 어떤 감정이 눈을 떴다. 바로 원망이었다.

린 각주의 치료를 받고 나서 임수는 처음으로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린신의 침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몸도 편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임수는 안도했다.

 

그동안 괴물이 된 외양과 살을 바르고 뼈를 부수는 것 같은 몸의 고통보다 임수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바로 피를 향한 갈망이었다. 하루 종일 다음 피는 언제 마실 수 있나 그것만 생각하는 삶은 임수의 영혼에 쩍쩍 금을 가게 만들었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괴물이 된 것 같아 비참하고 스스로가 역겨웠다. 그래서 버티기도 해봤다

 

-기 보다는 사실 버티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임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린신이 피를 주기 전까지는 마실 수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건 그거고 임수도 나름대로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애썼지만 단 하루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매일매일 머릿속엔 오직 피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오는 내내 성공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린신에게 덤볐고 그때마다 호되게 당했다. 린신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래도 임수는 린신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린신은 임수에게 거짓말을 했었고, 그 덕분에 더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매령에서 처음 임수에게 피를 줄 때, 어릴 때부터 귀한 약초로 만든 환약을 먹어왔던 린신의 피만이 임수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고 했다. 자기 피에는 특수한 성분이 있고 그 성분이 발작할 때 고통을 가라앉힌다고 했다. 실제로 린신의 피를 마셨을 때 고통이 사라졌기 때문에 임수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랑야산에 도착했을 때, 린신은 사실 모든 피가 고통을 경감하는 효과가 있고, 특히 사람의 피는 아무 피나 다 된다고 말했다. 처음엔 린신의 말만 믿고 린신의 피를 마시기 위해 당했던 수모가 떠올라 반사적으로 울컥했지만, 이내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거짓말 덕분에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니까. 만약 백성을 해쳤다면, 그것도 피를 빨아먹느라 사람을 해쳤다면. 그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데 린 각주를 만나 침술과 기공술을 받아 몸이 편해졌는데 거기에 더 이상 고통을 누르기 위해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마치 괴물이 된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슬에서 풀려난 것이었다. 그래서 임수는 처음으로 희망을 가졌다. 어긋나고 뒤틀려 궤도에서 벗어난 운명의 수레바퀴를 어쩌면 다시 제자리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린 락주가 자신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임수는 불안해졌고, 그 마음은 자연스럽게 임섭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아버님, 성질을 조금만 누르시지 않으시고!

 

그랬다. 임수였다. 이미 다 나온 이야기라 새삼스럽게 강조하기도 머쓱하지만 임수는 그때, 매령의 계곡에서 떨어진 사람은 본인이었다고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니까. 임수는 가슴을 탕탕 치면서 그때 임섭이 그런 짓을 했던 건 그놈의 욱한 성질머리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뻔하지. 평소 조용하던 동서 사옥에게 배신당하고, 적염군이 몰살당하고, 치명상을 입고, 아들까지 눈앞에서 다쳤으니 눈이 뒤집하고 욱해서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자식을 절벽에서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임수는 임섭의 행동을 나름대로 이해했다. 하지만 임섭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임섭은 임수를 떨어뜨리며 이런 말을 했었다.

 

-적염군을 위해서라도 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죽이면서 죽지 말라니. 생각할수록 기막혔다. 본디 인간이란 친한 친구의 부고를 듣고이런, 그럼 내가 빌려준 돈은?’이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도 있는 존재인지라, 그때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생과 사의 별리 앞에서 임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씀을 하시기엔 아버님과 저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이런 생각을. 그리고 상대에게 너는 살아남으라는 유언을 비장하게 남기는 사람이 어색하지 않은 올바른 시추에이션까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 성 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경비대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수세에 몰리고 몰살 위기에 처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서 동료를, 혹은 동료들을 성문 밖으로 밀고 문을 안쪽에서 닫으며 말한다. ‘(너흰) 살아남아라.’ 그리고 문을 닫고 자기 몸으로 경비대를 막아 시간을 번다.

 

2) 절벽 상황을 적용시키면 아버지가 매달렸고, 내가 아버지 손을 잡고 버틴다. 하지만 지친 몸은 길게 버티지 못하고 내 몸이 절벽 쪽으로 끌려간다. 그래서 아버지는 둘 다 죽을 수 없다고 결정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아버지가 나를 살리려고 죽었다고 충격받은 내가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살아야 할 동기까지 부여한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적염군을 위해서라도 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손을 놓고 떨어지며 내리사랑이 가득한 표정으로 끝까지 나를 보신다.

 

이래야 자연스럽지 않은가! 잡은 아들의 손을 놓고 떨어지면서 넌 살아남으라고 한다면 모를까, 세상천지에 매달린 아들의 손을 놓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면서 살아남으라고 당부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밝혀져야 할 매령 절벽의 진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있었다. 근본적이면서 충격적인 진실이.

 

그날 매령에서 임수는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임수가 손을 잡고, 놓고 문제 이전에 아예 절벽에 매달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임섭이 조금만 도와줬더라면. 그걸 생각하자 부정하기 애매할 정도의 크기였던 원망이 분명한 크기를 갖추기 시작했다.

 

소자 그때 분명히 봤습니다. 그때 소자가 절벽 끝에서 비틀거렸을 때 아버님께서 소자의 손을 잡아주셨죠. 소자의 발 하나가 절벽 쪽 허공에 들렸다지만 무게중심은 아직 땅에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아버님께서 소자를 잡아당기셨다면 소자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으셨죠. 그뿐입니까? 소자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때 아버님은 소자를 미셨습니다. 소자를 절벽 쪽으로 미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아버님께서 소자를 절벽에서 떨어뜨리시지 않으셨어도-

 

“그랬다면 쟤가 저렇게 살아남지 못했겠죠.”

 

“그렇긴 하지.”

 

? 현재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절망과 열린 줄 알았던 밝은 미래의 문이 불투명해진 불안이 맞물려 원망이 몸집을 키워 분노의 마차를 타고 속도를 높이려는데, 린신과 린 각주가 마차를 끄는 말을 풀어 놓아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임수는 눈을 끔벅거렸다.

 

“성질머리가 어지간해야 시체로 덮든, 기절시키든, 눈감고 움직이지 말라고 하든가 할게 아닙니까. 쟤 성질머리가 죽은 척하라고 얌전히 죽은 척할 성질머립니까? 눈만 깜박일 기운만 있어도 날뛸 녀석이 저 녀석 아니겠습니까.”

 

“그걸 잘 아니 그 친구도 그러지 않았겠느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대체. 임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님의 욱한 성질머리가 문제이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내 몸 치료가 순탄치 않다는 이야기에서 왜 갑자기 내 성격 이야기로 튀는 건데? 왜 내 성질머리잠깐, 혹시 저 두 사람, 처음부터 내 이야기를 했던 건가? 그 욱하는 성질머리가 아버님이 아니라 날 가리키는 거였어? 내 성질이 더러워서 아버님께서 날 절벽에서 떨어뜨리기라도 하셨던 말이야? 저 작자들이 정말!

 

임수는 울컥했다. 어이없어도 너무 어이없었다. 저 자들은 대체 날 뭘로 봤단 말인가! 인정한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간다. 내 성격이 좀 불같기는 하다. 온화나 침착과는 거리가 멀고 적염군의 시름이라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무장으로서 용감하게 싸워서 얻은 별명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당당하게 군을 이끄는 장수인 나를 천지분간도 할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취급을 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어떻게 내가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 어떤 무모한 짓을 할 수 있겠-

 

 

구나. . 할 수 있겠어. 그래 하고도 남지. 임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랑야각의 각주 부자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때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의식이 남아있었다면, 기어서라도 사옥에게 달려들어 발목이라도 물어뜯었을 것이 분명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임수는 조금 침울해져서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 아무리 설개충의 한독이 화상의 화독을 상쇄해 죽기 직전 중상자라도 연명시킨다지만, 쟨 그냥 화상만 입고 떨어진 것도 아니고, 흉부에 큰 자상까지 깊게 입은 상태였습니다. 설개충에게 물리기 전에 죽었어야 정상이었죠.”

 

“저 아이가 워낙에 강골로 명성이 높지 않더냐.”

 

“튼튼한 데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저 정도쯤 되면 솔직히 좀 소름이 끼칠 정도가 아닙니까.”

 

몇 번을 연이어 끔벅였지만, 임수는 다시 한번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끔벅였다. 그래, 내가 좀 튼튼하기는 하지. 한겨울에 웃통을 훌렁 벗고 말 타고 다녀도 멀쩡했으니까. 어머님도 항상 그러셨어. 내가 참 튼튼하다고. 이모님들과 담소를 나누실 때마다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니 그 말씀을 하실 때 어머님 얼굴이 해탈하신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자포자기하신 것 같기도 한 것 같아. 그래, 튼튼하지, , 정말 튼튼해. 본인의 튼튼함을 인정하는 임수의 얼굴은 수북이 덮은 털로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침울했다.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였어. 그때 아버님은 그 상황에서 날 살리려면 날 반쯤 죽이는 정도론 부족하고 거의 죽여야 해서 그러셨던 거였어. 아무리 가슴에 치명상을 입었어도, 게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었어도 머리를 쳐 기절시키는 정도로는 안심하실 수 없으셔서 날 절벽에서 떨어뜨리신 거였어. 그리고 그 몸상태로 그 높이에서 떨어져도 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걸 믿으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였어. 그래, 그랬던 거야.

 

임수는 이제 모든 상황을 이해했고, 부친을 향했던 미심쩍은 의혹도 깨끗이 해결했다. 하지만 임수는 우울했다. 아니, 그래서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 뭘까? 나란 존재는 도대체 주변 사람들에게 뭐였을까? 적염군의 천하무적 소년 장수 임수라는 타이틀은 지금까지 임수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본인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그 확신이 흔들렸다. 적염군의 시름이자 금릉의 재앙이라는 별명은 그냥 웃자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쪽이 진실인지도 몰랐다. 임수는 더욱 더 시무룩해졌다. 때 아닌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고찰이 임수를 사로잡아 머리와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고, 존재의 무게를 사라지게 만들고, 지금까지 알던 세상은 사실은 장막을 덧씌운 거짓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밀려오는 바람에 실린 냄새가 청량해 임수는 더욱더 우울했다. 영혼이 뒤통수 위에서 재가되어 파스스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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