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위님 중위님 꽃같은 우리들의 중위님 15
2012. 12. 17. 22:56
소심늘보 Generation Kill/꽃 중위님 시리즈 View Comments
* 막둥이랑 중위님이 수상해 (11/12)
*거친 언어 주의
존경하는 소대장 앞에서 바보가 된 브라보2 소대원들의 분노는 깊고 푸르렀다. 마치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비단 위에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마음처럼(변영로의 논개 변형).
“내가 미친놈이지! 네놈 장단에 춤을 추다니! 내가 미친놈이다!”
“미친 건 네놈인데 왜 날 때려! 악! 그만 패!”
브라보2 소대는 현재 과격한 동료 린치를 자행 중이었다. 모든 소대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린치에 동참할 때, 브랫은 홀로 그 집단 구타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건 브랫이 냉철하고 고고하며, 집단행동을 경멸하는 한 마리 고독한 늑대여서가 아니었다. 절대로. 만약 그랬다면 부재를 배설과 연결하게 하는, 즉 ‘똥 싸는 사나이’라는 이미지를 동료에게 굳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브랫은 홀로 벌어지는 불의에 가담하지 않고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일까? 바로 혼란에 휩싸여 주변이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브랫은 고민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했다. 레이가 조금 전 주장한 게이 차별 폐지광고 주장은 황당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황당한 주장에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고, 브랫이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을 납득할 수 있게 해주었고, 무엇보다 브랫이 차라리 그렇다고 믿고 싶은 주장이었다.
조금 전 브랫이 자리를 비웠던 건 에스페라의 예상과는 달리 배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분간 부대이동은 없다. 그러니 전략적으로 볼 때, 배변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비상시를 대비해 배설을 미리 해두기 보다는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정보수집이 더 시급했다. 그래서 브랫은 행동에 옮겼다. 그렇다. 조금 전 브랫이 자리를 슬쩍 비웠던 건 굳이 분류하자면 정찰이었다. 입구를 지키고 선 바렛 중사의 눈을 피해 막사 뒤쪽으로 돌아간 브랫은 장막의 틈새로 안을 살폈고……그대로 굳었다.
네이트와 크리스텐슨은
춤을 추고 있었다.
클럽이나 바에서 추는 그런 춤도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이 추는 춤과 비슷한 춤을 찾자면,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이야기의 끝 무렵, 주인공이 왕자와 추는 그런 춤이었다. 너무나도 우아하고 매끈해, 둘이 입은 야전복이 너무 어색한 그런 춤.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어야 어울리는 그런 춤! 그리고 패터슨 대위는 두 사람이 벗어둔 방탄장비 옆에 서서 마치 심사를 하듯, 가끔 턱까지 쓸며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넋이 나간 적이 없었을 정도로 브랫은 당황했다. 경악과 혼란이 브랫의 머리를 사정없이 강타했고, 브랫은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브랫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상황판단을 정확하게 하는 아이스맨답게 네이트의 포지션이 여자 포지션이라는 것을 포착했다.
거의 정신이 나가 자리에 돌아왔을 때, 레이는 신 나게 떠드는 중이었고, 그 정신 없는 수다가 브랫을 진정시켜주었다. 아, 그랬구나. 우리 중위님이 크리스텐슨과 그런 병신 같은 광고를 찍는구나. 그래서 그런 춤을 췄던 거였어. 그랬던 거구나. 그럼 아마 그 춤은 결혼 피로연에서 신랑과 신부가 추는 춤이었겠구나. 바로 이렇게 진정시켜주었다. 그래서 레이가 부케를 자신이 받겠다고 했을 때, 브랫은 경쟁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네이트의 쪽팔림을 덜기 위해 소대원이 나선다면 그 중 가장 많이 네이트의 짐을 나누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키스 이야기까지 나오자, 그냥 분홍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들러리 자리만 굳건하게 지키자고 마음을 바꾸기는 했지만.
아무튼, 레이의 얼토당토않은 주장 덕분에 브랫은 자신이 보았던 천인공노할……아니, 황당무계한 장면에서 받은 충격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네이트는 광고를 찍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중위는 과장은 할지언정 거짓말, 그러니까 본인이 의도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과장도 상부의 헛발질 때문에 죽도록 고생했던 전투가 무의미한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해하는 소대원에게 눈앞만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전략적으로 보면 중요한 다른 작전의 수행을 위한 위장작전이었으며, 그러니 결코 쓸데없는 헛고생을 한 건 아니라고 다독일 때나 했다. 그러니 네이트가 크리스텐슨과 게이 결혼 광고를 찍지 않는다고 했으면 찍지 않는 거고, 그 둘의 춤은 광고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왜 둘은 그런 춤을 춘 거지?
브랫은 크리스텐슨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말할 수 없다는 얼굴로 버텼을 때, 역시 목에 칼을 들이대야 했다고 후회했다.
*****
그 후 많은 가설이 떠오르고 물거품처럼 꺼졌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이라크 전쟁은, 적어도 제1수색대대의 전쟁은 끝난 셈이다. 후방 이송 후 귀국할 일만 남은 해병들은 지루한 시간을 이 흥미진진한 사건에 매달리며 보냈다. 그리고 장교들의 태도는 사병들의 호기심에 불을 더했다.
알파 중대장과 브라보 중대장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대대 안에서도 유명했다. 대부분 유능한 알파 중대장이 무능한 브라보 중대장을 일방적으로 한심해하며 무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는 했지만. 그런데 알파 중대장 패터슨 대위, 브라보 중대장 슈와체 대위, 브라보 중대 3소대 소대장 맥그로우 대위, 브라보 중대 2소대 소대장 픽 중위가 서로 어울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주로 엔시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호들갑을 떨고, 네이트와 패터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그 태도는 지금까지처럼 ‘그래, 너는 그래라, 이 한심한 작자야.’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동참했다. 그리고 패터슨과 네이트는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쓰게 웃었다.
사병들의 호기심의 열기는 점점 더 높아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기에 유능하기로 이름 높은 저 두 장교가 무능하기로 악명 높은 저 두 머저리와 거짓 없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저렇게 다정하게 어울리는가. 그리고 알파 중대장과 브라보 중대 2소대 소대장의 저 복잡하고 야릇하며 미묘하며 의미심장한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도대체 뭐길래 눈이 마주치면 서로 저런 얼굴을 하는가. 저 얼굴은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서로 다른 사람의 배우자가 된 연인을 보는듯한 애틋함과 쓸쓸함, 애수와 아쉬움마저 느껴지지 않는가! 사막의 열기가 결국 장교들의 머리를 익혀 호모 에로틱 바이러스가 퍼진 것이란 말인가!
“진짜요, 정말로요, 중위님. 제발 좀 알려주세요. 온 대대에 요상 망측한 소문이 다 퍼졌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레이레이에게 제발 무슨 일인지 알려주세요.”
“우리 소대는 그런 헛소문에 휘둘리는 소대가 아니리라 믿는다.”
“아 쫌! 진짜요! 저 진짜 들었거든요? 중위님 노랫소리 분명히 들었거든요!”
오늘도 매달리는 레이에게 천연덕스러운 장교의 얼굴로 말을 돌리던 네이트는 노래를 들었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 눈을 본 레이는 왠지 머쓱해져서 헛기침하며 변명했다.
“어, 흠. 그러니까 그게 뭐냐. 이렇게 멋진 중위님을 향한 제 뜨거운 충성심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 말입니다. 꽉 닫힌 문도, 커튼이 처진 창문도, 포기를 모르는 남자 레이레이의 앞을 막을 순 없지 말입니다. 비록 로프에 매달리느라 손바닥을 좀 희생하기는 했지만 레이레이는 결코 포기하지 않지 말입니다.”
“레이. 사회에 나가서도 그러면,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스토킹이야.”
“하지만 여긴 아직 하지들 소굴이니까 엄연히 스토킹이 아닌 훌륭한 해병수색대원이 지녀야 할 자세지 말입니다.”
네이트가 피식 웃었고, 그 웃음에 용기를 얻은 레이가 더욱 매달렸다.
“알려주세요. 네? 네? 네? 중위님. 도대체 막둥이랑 뭘 하셨는지 말입니다. 이 레이레이는 너무너무 궁금해서 잠도 안 오고, 잠이 안 오니 뇌는 계속 흥분상태이고, 뇌가 흥분상태이니 제 혀는 쉴 줄을 모르고, 제 혀가 쉴 줄을 모르니 불쌍한 브라보2 전우들의 멘탈은 너덜너덜해지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소대장님께서 소대원들의 멘탈건강을 위해 그게 이거였다! 짠! 속 시원히 밝혀주시지 말입니다.”
얼굴만은 심드렁하니 무심한 남자인 척 이미지 관리를 하던 브랫도 레이를 거들었다.
“제발 주둥이 좀 닥쳐라, 레이. 중위님, 정말 무슨 일입니까?”
“흠, 꼭 알아야겠다면…….”
레이가 눈을 초롱초롱거렸고, 브랫은 여전히 무심한 척 했지만, 귀를 쫑긋 세웠다. 그건 다른 브라보2 소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크리스텐슨에게 개인 교습(Private Lessons)을 해줬어.”
……해병은 남자다운 남자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집단이었다. 그리고 남자다운 남자란 최신 유행에 가벼이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너무 가볍다고 콧방귀를 뀌고 이젠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지나간 명작을 클래식으로 우러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적스와 허슬러는 외로운 군대생활에서 다정한 동반자다. 하지만 거기에 열광할지언정 신봉하는 건 너무 가벼운 처사다. 시원하게 배출을 했으면서도 요즘 섹스 심벌들은 너무 경박해 품위가 없다고 투덜거려야 진정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병이었다. 따라서 해병들에게 제니퍼 로페즈가 아이돌이라면 7, 80년대를 주름잡았던 섹스 심벌 실비아 크리스텔은 여신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에로 배우의 대표작을 해병들이 모를 리가 없었고, 그 사실을 소대장이 모를 리가 없다.
농담이겠지? 물론 농담일 거야. 웃어야 하나? 웃어야 하는데…….
네이트의 눈꼬리가 슬쩍 휘었고, 단정한 얼굴을 순식간에 색정적인 분위기로 물들이는 입술의 끝이 올라갔다. 소대원들은 얼어붙었고, 소대장은 씩 웃은 다음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한참 뒤에서야 제정신을 찾은 소대원은 소대장이 농담한 거라고 겁에 질린 얼굴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로는 레이조차도 사정을 캐묻지 못했다. 또 어떤 폭탄발언을 터뜨릴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거친 음담패설을 일상대화로 하는 해병들이었지만 저런 얼굴을 한, 존경하는 소대장이 품위(?) 있게 던지는, 성적인 뉘앙스를 담은 농담은 참으로 파괴력이 컸다.
또다시 다양한 가설들이 죽 끓듯 끓어올랐다 가라앉았다. 브라보2 소대, 브라보3 소대, 브라보 중대, 나아가 알파 중대 등, 모두가 부대에 휘몰아치는 이 폭풍의 원인을 알고 싶어 미치려 했다. 물론 브랫도 미칠 것 같았다. 단지 브랫의 경우, 호기심이 아닌 다른 것이 그를 벼랑으로 몰아세웠다. 가슴 속에 똬리 튼, 뜨겁고 차가우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격렬해지는 불길이 브랫의 인내심을 좀먹었다.
그리고 이 소동은 1주일 뒤 특별휴가에서 돌아온 이등병 크리스텐슨이 그간의 모든 사정을 밝힌 다음에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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