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eirdy M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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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치는 밤이었어요. 커다란 배는 무력한 나뭇잎처럼 시커먼 바다 위에서 요동치고 있었죠. 선체는 위태롭게 기우뚱거리고, 뱃사람들은 로프를 당기고, 소리를 지르며 분노한 바다에서 배를 지키려 필사적이었어요. 그런데 이 소동이 벌어지는 배의 한복판에서 브랫 왕자는 근사하게 몸을 쭉 펴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단단한 조각상처럼 한껏 폼을 잡고 서있었어요.


비상상황이라 모두 정신이 없는데 문짝처럼 거대한 작자가 딱 가운데 자리잡고 저러고 있으니 거치적거리기가 이를 데 없었죠. 우락부락한 뱃사람들이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겨도 브랫 왕자는 끄떡없었어요. 신경 쓰지 않았죠. 왜냐면 지금 브랫 왕자의 모든 신경은 검은 수면 위로 동그랗게 솟아난 작은 머리를 향하고 있었거든요.


맞아요. 지금 브랫 왕자의 상태는 번식기를 맞아 암컷 새 앞에서 가슴을 한껏 부풀린 수컷 새 같은 상태였어요.

 

B국은 바디를 낀 작은 도시국가였어요. 지금은 양식업과 교역으로 제국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옛날에는 가난한 어촌이나 다름없는 나라였답니다. 그런데 브랫 왕자의 고조모께서 바다의 사악한 마법사를 굴복시키시면서 나라의 운이 활짝 피었답니다.


마법사는 복종의 의미로 B국의 바다는 천국 같은 평화가 함께 할 거라고 맹세했어요. 태풍과 사나운 어류가 피할 것이며, 수온과 플랑크톤의 밀도 역시 일정하게 유지될 거라고 했죠. 생각해보세요. B국의 양식장은 양식업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천국의 양식장이 됐어요. 변수가 발생하지 않고 항상성이 보장되는 양식장이어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동일 무게의 금과 맞먹는다는 비싼 조개의 완벽한 양식 조건이었거든요.


황제도 식탁에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고, 한번 먹어본 사람의 무덤 앞에서 조리하면 저승에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난다는 환상의 조개는 예민하고 까다로워 양식 자체가 불가능하고 채취할 수 있는 기간도 1년에 딱 보름 밖에 되지 않았죠. 그리고 B국은 그 보름 동안의 수입으로 1년을 버텼고요.

그런데 이제는 양식한 조개를 언제나 순풍이 푸는 해로를 통해 수출할 수 있게 됐죠. 여왕은 막대한 국익을 순식간에 쌓았답니다.


환상의 조개와 함께 국고를 채우는 쌍두마차는 진주조개였어요. B국의 조개는 다른 산지의 조개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크기와 영롱한 광택으로 인어의 눈물로 불리며 전세계 왕족과 귀족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이 됐죠.

몇 대를 이어 대책 없이 쌓이던 나라 빚을 말끔하게 청산한 날, 여왕은 이 기쁜 날을 축하하기 위해 진주로 기념품을 만들라고 명령했어요. 상황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어요. 마땅하다면 마땅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시츄에이션이었죠. 단지 문제는 그 기념품의 정체성이었어요. 여왕이 만들라고 명령한 건 다름 아닌 Codpiece, 즉 코드피스, 바로 고간주머니였거든요.


나라를 부유하게 일으킨 여왕이 하필이면 어째서 왜 코드피스 제작을 주문했을까를 두고 여러 가설들이 분분했어요. 그리고 두 가지로 정리됐답니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가진 여왕이 단 한 가지 갖지 못한 것을 선망해서 보상심리로 만들게 했다는 가설과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운 건 좆을 가진 남자가 아니라 바로 여자인 나라며 좆이 대단하긴 뭐가 대단하냐며 조롱하려는 의도로 만들었다는 가설이었답니다. 하지만 진실은 오직 여왕 만이 알고 있겠죠. 불만은 후손에게 이어지고요.


여왕은 독특하다 못해 괴랄한 왕실 보물을 만든 것도 모자라 계승식을 마친 후계자는 성별을 불문하고 이 고간주머니를 착용해야 한다고 못박았죠. 그러니 필연적으로 이 진주고간주머니는 계승식에서 후계자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었죠. B국의 후계자들은 계승식이 다가오면 우울해졌어요. 그럴 수밖에 없죠. 다른 왕실의 후계자들은 예식에서 왕관이나 홀, 하다못해 브로치를 받을 때 B국의 왕위후계자는 고간주머니를 달아야 한다니까요.

다른 왕실의 예식에서 후계자가 금관을 물려받고 거만한 표정을 할 때, B국의 후계자는 세 명이 오른쪽, 왼쪽, 앞쪽에 쪼그리고 앉아 민감한 부위에 거의 코가 닿을 듯 밀착해서 빠르고 정확하게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꼴을 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관리를 해야 했답니다


후계자들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어쨌든 계속 사용하다 보면 수선을 피할 수 없는데, 비극은 여기에서 발생했죠. 원래 있는 진주를 죄다 떼어내도 시원찮을 판에 수선을 맡은 장인들은 왕실에 대한 존경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며 반짝이는 보석을 추가해버렸죠. 에메랄드, 사파이어, 루비 등등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보석의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브랫 왕자에 이르러서는 원래 있던 진주만 남기고 전부 뗀 다음, 가장 작은 알이 엄지 손톱만한 다이아몬드 수백 개를 빼곡하게 달아버렸죠.


생각해보세요. 걷거나 움직일 때마다 실외가 됐든, 실내가 됐든 빛이 있으면 그 빛을 상하좌우 360도 블링블링 트윙클 샤이닝 반사하는 그 참담한 비극을요. 차라리 왕관이면 좀 부끄럽고 말지, 고간주머니로 찬란발광 아몰레이드 반짝반짝 빛을 뿌리고 다녀야 하는 브랫 왕자는 섬세한 사춘기 시절 암굴에 은둔하는 구도자가 될까 진지하게 고민했답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고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괜찮아진다더니 왕위고 뭐고 전부 내던지고 가출하고 싶던 격렬한 수치심도 세월과 함께 옅어졌고, 얼마 전에 고간주머니 확장 보수를 해야 했을 땐 뿌듯하기까지 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저 아름다운 인어의 시선을 끄는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으니 왕자는 고간주머니가 만족스러웠어요. 수선할 때 주머니 가운데를 메추리알만한 다이아몬드로 장식하자는 의견을 거절했는데 아무래도 재고해봐야 할 것 같다고 브랫 왕자는 마음을 바꾸었죠.


 순항이 보장되는 해로는 어떻게 되고 왜 브랫 왕자가 탄 배가 폭풍에 휘말렸냐고 물으신다면 브랫 왕자가 준비된 상태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해서라고 답할 수밖에요. 아무리 바다의 마법사가 안전한 항로를 보장했다지만 타인의 호의에 의존하지 않는 항로를 개척해서 나쁠 건 없었죠. 하지만 영해를 벗어나자마자 이런 심한 폭풍을 만나게 될 줄은 브랫 왕자도 알지 못했답니다.


 바다도 울렁거리고 배도 울렁거리고 브랫 왕자의 속도 울렁거렸어요. 뱃멀미였죠. 하지만 브랫 왕자는 뱃멀미를 인정할 수 없었어요. 뱃멀미에 시달리는 해상교역특화 도시왕국 왕자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타이틀이에요? 그래서 왕자는 돛대의 밧줄을 잡고 나는 바다와 함께하고, 바다는 나와 함께하니, 바다가 나고, 내가 바다로다, 그러니 멀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기기만을 시도했어요. 그리고 바로 그때 왕자는 인어를 발견했답니다.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에서 사람 머리가 쏙 나왔을 때, 왕자는 처음에는 배에서 떨어진 선원인가 싶었어요. 하지만 허우적거리지 않고 침착하게 배를 바라보는 게 이상했죠. 그래서 유심이 바라보는데 번개가 번쩍였고, 왕자는 보고 말았던 거예요. 어둡게 젖은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 그리고 빛이 스며 투명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요.


 둘 사이의 거리가 꽤 있는데 어떻게 눈동자 색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단지 분명한 건 그 눈을 보자 가슴이 시린 것도 같고,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도 같고, 몽글거리는 뭔가로 꽉 채워지는 것도 같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이는 것도 같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업는 감정에 휩싸였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확실한 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순간처럼 자기를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 적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왕자는 바쁘게 할 일을 하는 뱃사람들의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멋있게 보이는 각도로 얼굴을 돌리고, 허리를 쭉 펴 거대한 맹수 같다는 평을 듣는 몸을 더욱 돋보이게 했죠. 그리고 인어가 눈을 떼지 못하는 고간주머니를 자랑하듯 쓰다듬으려다가 그건 좀 심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뒀죠.

 

그리고 왕자가 눈에 좀 더 힘을 주고 또렷하게 인어에게 시선을 주는 그때였답니다. 파도가 배를 덮치고 중심을 잃은 배가 암초에 부딪친 것이. 선체가 기우뚱 기울더니 배가 두 조각이 났어요. 그리고 왕자는 배의 파편과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어요.


 시야는 어두웠고, 물속에선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랜지 구분할 수 없었죠. 허우적거리는 손 너머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어요. 내심 인어인가 기대했는데, 나타난 건 사나운 기세로 입을 쩍 벌린 상어 두 마리였죠. 기대는 실망을 낳고, 실망은 분노로 이어졌답니다. 이 자리는 너새끼들이 아닌 그 사람 자리였어야 해! 이렇게 이를 갈며 왕자는 맨손으로 상어 두 마리와 사투를 벌였답니다. 이 상어들만 아니었으면 그 아름다운 인어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느새 이 상어들만 치우면 인어가 온다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바뀌었죠.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가 화끈해지더니 시야가 어두워졌어요. 배의 파편에라도 부딪친 걸까요?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가라앉는 몸이 엉킨 해류에 휘말려 돌려졌어요.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왕자는 인어의 하얀 얼굴을 본 것 같았어요.

 

 

*******

 

문득 정신이 들자 입 속에서 껄끄럽게 굴러다니는 모래가 느껴졌어요.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느껴졌죠. 손바닥 밑으로 모래가 만져졌고요. 해변으로 밀려왔나? 왕자가 천천히 눈을 뜨지 바로 얼굴 위로 빛을 등진 그림자가 보였어요.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푸른 하늘 사이로 인어의 얼굴이 보였죠. 왕자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어요.

 

네가 나를 살렸구나.

 

인어는 가만히 브랫 왕자를 응시하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고간주머니를 바라보았죠. 뜨거운 욕망이 느껴지는 그 시선에 브랫 왕자 역시 몸이 뜨거워졌죠. 손을 들어 인어의 얼굴을 감싸니 부드러운 서늘함이 느껴졌어요. 인어는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기울여 왕자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어요.

 

이름을 알려줘.

 

나다니엘.

 

생김새에 어울리는 단정하고 명료한 목소리였어요. 그리고 천사 같은 얼굴에 어울리는 이름이었죠. 천국의 아름다움이 내 앞에 있다고 왕자가 수작을 부리려는데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어요.


 퍼뜩 몸을 일으킨 인어는 바다로 달아나버렸답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인어가 푸른 바다로 사라진 순간 근위대장 에릭 코커가 부하들을 이끌며 나타났어요.


 충성심 강한 근위대장은 왜 왕자가 짜증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하지만 죽다 살아나서 놀라서 저러나 보다 이렇게 납득했죠. 참 선량한 사람이었어요. 이유 없는 타박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하루종일 시달린 브랫 왕자는 사람들을 다 물리고 혼자 저녁 노을로 물든 해변을 걸었어요. 나다니엘을 생각하니 그리움이 차올랐죠. 전설에서 인어공주는 왕자를 위해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이 됐다던데 나다니엘도 나를 위해 인간이 되어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왕자인 건 알까? 나를 만나러 여기 다시 왔다가 없는 걸 보고 실망해서 그냥 돌아가면 어쩌지? 임시거처를 마련해 죽 여기서 기다릴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정말 나다니엘이 나를 다시 찾아오기만 한다면 몇 년이든 기다릴 수-


, 브랫 왕자는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왕자의 얼굴에 떠올랐어요. 숨을 들이킨 왕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고 이내 바다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나다니엘에게 달려갔답니다. 두 다리로 비틀거리며 걷던 인어는 결국 중심을 잃고 왕자의 가슴으로 쓰러졌어요.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칼날과 바늘 위를 걷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전설이 떠오른 브랫 왕자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죠.

 

나다니엘. 맙소사, 나다니엘. 정말 너야?

 

왕자를 올려보며 인어는 입술을 달싹거렸어요. 하지만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아름다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죠. 역시 전설대로였어요. 바다의 마녀, 아니, 이 경우엔 마법사겠군요. 바다의 마법사는 나다니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대가로 다리를 준 거였어요. 나다니엘은 그렇게 얻은 다리로 걸음마다 따라올 끔찍한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브랫을 만나러 온 거죠. 단지 어제 만난 사이일 뿐인데. 아직 서로를 알지 못하고 막연한 호감만 가진 상태일 뿐인데.


 인어의 격렬하고 뜨거운 헌신적인 사랑에 브랫 왕자는 눈물을 흘렸어요.

 

널 실망시키지 않을게. 약속해, 나다니엘.

 

왕자는 망토를 벗어 인어의 알몸에 둘러주었어요. 그리고 위태롭게 발을 내딛는 나다니엘을 안아올리고 왕궁으로 향했죠. 왕자의 마음에는 인어를 향한 사랑과 고마움, 감동과 안타까움, 애틋함이 가득했답니다. 평생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주겠다고 신에게 맹세했죠.



 

그런데 나다니엘은 정말 브랫 왕자의 생각대로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순정 인어일까요?



 

설마 그럴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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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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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킬. 브랫네이트. 브랫네잇







D-3


 


 


 


 


1 30.


글쎄. 짧다면 짦은 시간이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인스턴트 음식도 익지 않는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1 30초는 브랫에게 결코 하찮은 시간이 될 수 없었다. 째깍-하고 초침이 움직여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반 바퀴를 도는 그 사이, 브랫의 세상은 무너졌으니까. 애틋한 소망을 담아 조심스럽게, 그토록 힘겹게 쌓아 올렸던 세상은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터무니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렸다.


 


시간이란 그 어떤 나쁜 것도 괜찮게 만들어줬다. 적어도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익숙해지도록 해줬다. 브랫의 경우 외로움이 그랬다. 허한 마음에 벗어나려 허우적거릴수록 결국 상처만 남았다. 몇 번의 상처가 쌓이고, 그 상처는 아물면서 딱딱해지고, 심장을 단단하게 굳혔다. 시간은 흘렀고 브랫은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외롭지만 안전한 상태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인생을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단순히 각자의 길을 걷다가 하나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이 아니었다. 두 갈래의 길이 하나로 만나는 그 곳은 신이 충실한 신도에게 약속한 축복의 땅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황폐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가꿔야 하는 미개척지였다. 게다가 그 노력이 반드시 보상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함께 길을 걷다 실패한 경우는 주변에 수두룩했다. 게다가 대부분 전보다 못한 모습으로 망가지기 일쑤였다. 왜 굳이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 진창에 뛰어들어야 하지? 브랫은 외롭지만 안전한 울타리 밖을 나가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호감 이상의 감정이 드는 사람을 만나면 감정에서 달아났다. 아주 익숙하게. 스스로도 속일 정도로 아주 능숙하게.


 


하지만 운명은 가장 방심한 순간 발 밑에서 움푹 꺼져 진창에 빠지는 함정을 숨기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길에. 그 함정을 브랫 역시 피할 순 없었다.


 


느닷없이 브랫의 인생에 나타난 사람은 지금까지 스쳐 지나갔던 사람과 달랐다. 브랫이 원했던 그 모든 것이었고, 브랫이 꿈꾸었던 세상 그 자체였던 사람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던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이라는 기대감을 다시 깨운 사람이었고, 브랫이 이미 외로움에 익숙해져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한 사람이었다. 브랫은 괜찮지 않았다. 조금도. 여전히 가슴이 시릴 정도로 외로웠다.


 


안타까울 정도로 연약한 사람이었다. 한숨을 쉬면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켜주고 싶었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선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브랫을 이해하고 감싸줄 것 같았다. 함께 하는 길이 서툴고 낯설어서, 그래서 두렵고 겁이 나서 브랫이 방황해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돌아올 수 있는 집이 되어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 한 갈래로 이어지는 길이 보이는 그 지점, 언제나 맞닥뜨리면 외면하고 달아났던 그 지점에 브랫은 온몸을 던졌다.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토록 애틋하고 소중했던 세상은 무너지고 말았다. 원하는 마음 자체를 인정하는 과정 조차 힘들었던, 그토록 간절했던 소망은 모두 처참하도록 조각조각 부서져 무너지고야 말았다.


 


세상이 무너지고 잔해만이 흩어진 광경은 참혹했다. 총탄이 패인 벽, 탄피, 곳곳에 튄 피와 인간의 시체를 구성했던 덩어리, 식어버린 피에서 올라오는 비린내,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시체-라고 시적(?)인 표현을 하고 싶지만 훈련과 재능이 제2의 본능으로 갈고 닦아준 덕분에 대충 넘기고 싶어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밖에 없는 39구의 시체.


 


그리고 이 참사의 한가운데 서있는 놈.


 


저 놈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저 놈 때문이었다. 저 새끼 때문에!


 


난동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는데 눈이 마주쳤다. 브랫의 경악을 비웃는 그 눈을 본 순간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머릿속에 소란스러웠고, 동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기분이었고, 빛조차 검게 빨아들이는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가슴을 터뜨릴 것처럼 요동치는 격한 감정만이 생생했다. 당장 고함을 지르며 폭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에 휩쓸려 감정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브랫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어떤 상황에서 냉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혹독하게 받았던 훈련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고약함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감상적인 소망을 애써 뒤로 밀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브랫은 실수를 깨달았다. 심호흡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화약 냄새와 섞인 역한 피비린내가 신경을 건드렸으니까. 빌어먹을. 입술을 실룩거린 브랫이 성급하게 눈을 떴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동일한 외부 조건은 동일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현실은 다시 잔인하게 브랫을 짓눌렀다.


 


브랫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세상은 목뼈 부러지는 소리에 갈라지고, 숨이 넘어가라 웃는 소리에 산산조각 났다. 심지어 저 새끼는 여전히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맞물린 어금니와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당장 달려들어 거칠게 요동치는 이 감정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브랫은 페이션스 세 번이면 커리어 붕괴를 면한다는 정체불명의 격언을 떠올렸다. 그 혹독한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을 때 자랑스러워하던 훈련 교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쳤다가 다시 궤도에 올라 순항하는 커리어를 떠올렸다. 진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페이션스. 페이션스. 감정을 가라앉힌 브랫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감정을 가라앉혔다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인 어투로 한 마디, 한 마디 짓씹듯이 경고했다.


 


그만 좀 웃지?”


 


그제야 이제는 거의 흐느끼던, 39구 시체 발생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흉악범이자 브랫의 세상을 부순 원흉이 허리를 폈다. 그리고 웃느라 고인 눈물을 닦았다. 그 꼴을 보니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 놈을 응징해야 한다는 정의의 분노가 목소리를 높였다. 브랫은 다시 스스로에게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또 경력 진창에 꼴아박고 쓰레기 되고 싶어서?’


 


슬럼프 시절, 쓰레기통 속의 쓰레기와 자기를 차별화하는 구분 요소는 무엇인가,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하는 가에 대해 깊은 철학적 고찰을 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분노는 가라앉고 마음은 평정을 되찾아 잔잔해졌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터지기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너 말이야.”


 


브랫의 비통함을 존중해 웃음을 지울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한, 웃음이 잔뜩 묻은 그 목소리에 브랫은 예감했다. 아니, 확신했다. 저 새끼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내 속을 뒤집을 것이다. 복장을 터뜨릴 것이다. 날 엿먹일 것이다. 페이션스. 페이션스. 페이션스. 간절함을 담아 인내를 되뇌었지만 진정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브랫은 결국 신에게 간절하게 기원했다.


 


머저리 해병을 나름의 방법으로 돌본다는 해병의 신이시여. 부디 제 자제력을 보우하사 제 커리어를 다시금 좆되게 하지 마소서.’


 


하지만 해병의 신은 그 기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너 진짜 귀엽게 논다.”


 


자고로 감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 공적 영역에서의 모욕보다 사적 영역에서의 조롱이 더 참기 힘든 법이었다. 브랫은 나름 대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견뎌야 했던 무능하고, 비겁하고, 그 주제에 전공 욕심은 많아서 악의를 드러내던 상관들의 목록을 떠올리며 저 새끼가 아무리 지랄해도 그 새끼들보다는 덜 악랄하지.’ 이렇게 자기 세뇌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귀엽다고 아니고(물론 이건 이것 나름대로 짜증나지만) 귀엽게 논다라니. 그 말은 팽팽하게 당겨져 툭툭 끊어지던 브랫의 인내의 실 마지막 한 가닥을 끊기 충분했다. 머릿속에서 툭-하고 정신 영역에 속하는 소리가 들렸고, 다음 순간 브랫은 발에 힘을 주고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그리고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격렬한 분노로 점철되고 그 결 사이로 후회가 스민 강렬한 펀치였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기만이었다. 브랫은 사로잡은 감정의 정체는 분노가 아니었다. 정말 분노가 조금도 없냐고 공증 서류를 내민다면 서명할 순 없겠지만, 법적 강제력이 없고 감정에 솔직한 고백을 한다면 만약 브랫이 현재 분노를 느낀다면 그 분노는 진정한 분노가 아니고 부끄러워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워서 그 부끄러움을 덮기 위한 과장된 분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도 막 수줍고 망설이고 쭈뼛거리는 그런 귀여운 부끄러움이 아니라 스스로의 안목을 한심해하는 쪽팔림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금 브랫은 쪽팔림이 극에 달해 화까지 난다는 말이었다.


 


, 감정의 진정한 정체성이야 어쨌든 강인한 주먹은 의도했던 목표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물론 이 표현에도 논란의 여지는 있었다. 애초에 브랫이 때리려고 마음 먹었던 지점은 곧게 뻗은 콧날이었으니까. 하지만 최종적으로 충돌한 곳은 광대에서 약간 비낀 얼굴이었다. 하지만 실수는 아니고 이 또한 브랫의 의도가 분명했으니 정확한 가격은 정확한 가격이었다. 아무튼 브랫은 조금 전부터 펀치를 날리고 싶었던 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토록 달콤한 꿈을 꾸게 해주었던 천사의 날개인 동시에 이 끔찍한 악몽 속에서 눈을 뜨게 한 원흉이자, 온도와 습도가 자동 조절되는 온실 속에서만 살 수 있는 난초의 탈을 쓴 대학살의 사신이자,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애틋해서 머리카락을 스치우는 바람에도 안타까워 안절부절했지만 지금은 숨쉬는 꼬라지도 보기 싫어서 코를 암모니아에 적신 솜으로 틀어막고 싶은 놈의 얼굴을 쳤다는 말이었다.


 


듣는 사람이 어깨를 움찔거릴 정도로 꽤 아픈 소리가 났다. 그리고 욕이 뒤를 이었다. 처음에 들리는 욕은 해병이었던 브랫이 익히 아는 욕, 설명을 덧붙이자면 일반 시민과의 사회적 교류에서 사용했다가는 사회적 매장을 각오해야 하는 욕이었다. 하지만 그 욕이 끝난 후에는 해병이었던 브랫조차 듣도 보도 못한 험악한 욕이 뒤를 이었다. 그걸 듣고 있자니 브랫은 새삼스럽게 미치고 팔짝 튈 것 같았다.


 


내가 미쳤지. 저게 안타까워서 애간장을 졸이다니. 브랫은 조금 전까지 가슴을 태웠던 걱정을 새삼 되새겨보았다. 두려움에 떨며 브랫을 부르며 기다리는데 결국 늦을까봐 정말 속이 다 타는 줄 알았다. 겁에 질린 얼굴이 막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채찍질했었다.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하게 될까봐 눈에 피가 들어가 새빨개진 시야를 손으로 닦아가며 여기까지 왔었다. 겁은 개뿔이. 걱정도, 두려움도 아무 쓸모 없는 헛수고였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고, 브랫은 분통이 터졌다. 얼굴과 지나칠 정도로 불협화음을 이루는 욕을 쏟아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억울함이 새삼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저 망할 새끼 낯짝을 좀 보라고! 저 상판때기를 좀 봐! 사람이, ? 저런 면상을 보면 좀 정신이 울렁거려서 촌스럽고 구시대적인 마초 로망을 꿈 꿀 수도 있지. 그걸 꼭 이렇게 잔인하게 깨뜨려야 하냐고. 좀 친절하게 알려주면 안 돼? 제기랄. 내 운명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길래 항상 이 모양 이 꼴이냐고!


 


그랬다. 포기했던 행복을 향한 마지막 용기라느니, 애틋하게 쌓은 소망으로 세상이라느니 낯간지럽게 말했던 실상은 이랬다. 브랫은 얼굴에 홀려 혼자 착각에 빠져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켰다가, 냉정한 현실 앞에서 섬세한 감수성이 와장창 부서진 것이었다. 하지만 브랫은 운명을 탓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남(?)에게 책임을 전부 미루는 머저리는 될 수 없기 때문에 눈 한쪽을 찌르고 싶다고 책임을 분담하는 분통을 터뜨린 후 운명을 저주했다. 아니, 저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슬럼프 시절 브랫을 갈구는 것을 낙으로 삼던 내부의 비판자의 지적이 너무 뼈아팠기 때문이었다.


 


남 탓 할 일이 아니지.’


 


하긴 그랬다. 따지고 보면 운명은 결백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운명은 이미 브랫에게 차고 넘칠 정도로 경고했으니까. 이 길로 오지 말라고 괜히 안 하던 짓 하지 말고 원래대로 살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 손을 굳이 쳐내고 이 선택을 한 건 브랫 본인이었다. 결국 자기 손으로 판 무덤이었고,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간 진창이었다.


 


그렇다고 저기 얼굴을 얻어맞고 욕하는 놈을 탓하자니 애매했다. 왜 사람 착각하게 만들고, 여지를 줬냐고 따지기엔 애초에 저 놈은 그런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놈을 보면서 브랫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꿈꾸고, 설탕으로 코팅해 운명의 사랑이니, 행복해지기 위한 마지막 기회니 생쑈를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단에 책임이 있다면, 적어도 산산조각 난 브랫의 순정에 책임이 있다면 전적으로 브랫에게 있었다.


 


그러데 이렇게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책임 소재를 가리는 목적은 대개 왜 그랬나, 어떻게 했나를 분석해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브랫에게 일어난 비극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했다.


 


먼저 조금 전 주먹을 날릴 때, 타격점을 변경한 것만 해도 그랬다. 주먹이 코에 닿기 직전 브랫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코에 제대로 주먹이 들어가 코뼈가 주저앉고 치료를 했지만 코의 선이 망가져 다시는 이 콧대가 나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힘의 방향을 약간 아래로 조절했다. 그때 다시 무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치아가 나가 의치를 박았지만 미묘하게 턱의 선이 망가져 지금의 얼굴선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재앙이었다. 그래서 브랫은 타격점을 변경했다.


 


그리고 눈을 찌르고 싶다는 표현에도 문제가 있었다. 대개 그런 말은 실행에 옮길 일이 없는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이었다. 본인의 안목과 선택을 후회하고 그 감정을 과장하려는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브랫은 한쪽 눈이라고 굳이 대상을 한정했을까?


 


커다란 통에 우주선 부품을 넣고 그 통을 흔들었을 때 우주선이 완성될 확률을 떠올려 보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그 경우의 수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정말로 그 통을 천 년 만 년 흔들어도 우주선이 완성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확신한다면, 당신 몸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고롱고롱 잠에 든 강아지를 영영 떠나 보낼 수 있냐고 다시 질문해보자. 강아지와 작별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천 년이나 만 년이라는 시간의 무제한을 지적하며 아주 희박한 확률로 우주선이 완성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릴 것이다. 브랫의 경우가 이러했다.


 


양쪽 눈을 찌르고 싶다고 했는데 재수에 옴이 붙어서 신이나, 우주의 힘을 관장하는 절대자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브랫의 분통에 공감하며 두 눈을 찌르면 시간을 되돌려 선택의 기로에 다시 서게 해준다고 제안한다면? 해병 체면이 있지 뱉은 말, 그것도 본인을 향한 고통을 담보로 한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눈을 찔러 감정의 진정성과 해병의 용맹함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한쪽 눈이라고 빠져나갈 구멍을 팠던 것이다. 재수 없어서 눈을 대가로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 똑 같은 선택을 하고 똑 같은 진창에 빠진다 해도 남은 한쪽 눈으로 저 낯짝을 계속 봐야 하니까.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 경우의 수를 고려할 정도로 진지하고 열정적이고 집요하고 구제불능의 욕망을 새삼스럽게 자각한 브랫은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자기 혐오에 허우적거리는 브랫의 귀에 욕설 메들리가 들렸다. 해병의 영혼에조차 날카롭게 다가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스크래치를 남기는 참으로 저속하고 험악하고 폭력적인 욕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욕을 쉴 새 없니 퍼부어대는 저 주둥아리는 재앙의 주둥아리였다. 그리고 저 저주 받을 주둥아리가 자리잡은 얼굴은


 


지저스 뻐킹 크라이스트. 브랫은 믿지 않는 종교의 신을 저주했다. 그만큼 브랫의 현재 심정은 절망적이었고, 그 절망의 크기만큼 진실은 가혹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이랬다. 브랫을 구제할 길이 없는 진창으로 밀어 넣는 욕망을 부채질하는 진실의 전말은 바로 이랬다.


 


저 놈은 예뻤다. 한 마디로 예뻤다. 미칠 듯이 예뻤다. 환장할 정도로 예뻤다. 전에도 예뻤고, 지금도 예쁘고, 앞으로도 예쁠 것 같았다. 그래서 브랫은 망했다. 이 지경이 되고도 예쁘다니. 정말 눈을 찌르고 싶었다. 물론 한쪽 눈만.


 


주변에 시체는 널렸고, 피비린내는 진동했고, 악마도 울음을 터뜨리며 달아날 것 같은 욕은 끊이지 않았고, 브랫은 참담했고, 운명의 신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고,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은 여전히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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